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임경선의 무라카미하루키에 관한 책<어디까지나 개인적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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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는 듣습니까
어느 정도 가게가 안정도 되고, 단골손님들의 반갑고 낯익은 얼굴이 서서히 지겨워질(?) 무렵, 불쑥 주인이 던질 수 있는 다음의 한마디를 그는 미치도록 사랑한다.
“이거, 어쩌죠? 정말 죄송하게 되었네요. 실은 저희 곧 이사 간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로 이런 말이 주는 쾌감을 좋아한다. ‘에잇, 다시 시작하지 뭐’하는 느낌은 중독성이 너무 강하다고 강조한다. 기존에 쌓아 올린 것을 다 엎어버리고 제로에서 다시 새로 시작하는 쾌감을 한번 체득하면 그 중독성을 떨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사한 가게로 단골손님이 졸졸 같이 따라와서 장사를 도와주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소설은 잊어버리자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어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청춘과의 결별’ 같은 것이었죠. 한번 써보고 다시 한 번 고쳐 쓰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서 수정을 거듭했지요. 내 마음을 가장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소설이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다 쓰고 나니 내가 쓰기 전과는 사뭇 다른 장소에 놓인 듯했습니다.”
소설가의 책무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새기는 말이 있다. ‘혹시 여기에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나는 알의 편에 설 것이다. 우리는 모두 더없이 소중한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알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다.
바로 ‘시스템’이라는 벽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이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어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책무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벽과 알’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가 ‘나는 약한 것들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약한 것들은 옳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옳지 않아도 약한 사람/것들의 편에 서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말은 좌파적인 ‘정치적 올바름’에 의존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좌파들은 ‘약한 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지만 약한 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약하기 때문에 옳은 게 아니라 애초에 강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거리 주자
그의 ‘3개월 집필 기간’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 3개월 중 실제로 정말 중요한 시기는 딱 2주의 ‘고농축 집중기간’이었다. 하루키는 가장 중요한 이 시기를 ‘내 안의 우물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안에서 이야깃거리를 퍼 오는 행위에는 부단한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루에 14시간 동안 스트레이트로 집필하면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안 자는 생활로 그 시기를 버텨낼 수 있겠는가? 자기 안에 있는 ‘괴물’이 놀라서 나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힘없이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동종 업자와 대화하는 법
류에 대해서 하루키가
무라카미 류는 전업 작가로만 보기는 힘들다. 그는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이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그럴듯한 직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 사회가 류라는 인간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즉 ‘직업’이라는 설정 자체가 류한테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상황’이었다.
한편, 우리 둘이 같이 전장에 나갔는데 내가 중상을 입게 된다면 류는 한 시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나를 간호해줄 사람이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면 아마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저기 말이야 하루키, 나 방금 좀 할 일이 생각났거든. 그래서 그 일 끝나면 다시 돌아올 텐데, 그 사이 혼자 있어도 괜찮겠지? 금방 끝날 거야.” 물론 나는 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류를 비난할 수 없다. 이 사람은 고래처럼 입으로 상황을 들이켜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류에게 정지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나는 ‘어, 이거 큰일 났네’라고 생각하면서도 ‘류니까 하는 수 없지’라고 여기며 전장에서 혼자 외로이 죽어갈 것이 틀림없다. 역시 이것도 류의 인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루키에 대해서 류가
한 작가의 출현으로 내 일이 편해졌다. 남이 나를 더 선명하게 해줄 때 그렇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작가에게 그만한 저력이 있어야 한다. “네놈이 데뷔해서 내가 편해졌어”라는 말을 나는 한 선배 소설가에게서 들었다. 나는 같은 의미의 말을 하루키에게 했다. ‘편해졌다’는 건 이상한 표현이지만 더 편하게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하루키를 생각하면 한 정경이 떠오른다. 서로 안 지 얼마 안 된, 음악을 좋아하는 두 명의 소년이 방에서 레코드를 듣고 있다. 두 소년은 일렉트릭 기타의 선율에 흠뻑 빠져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다. 몇십 번 반복해서 두 소년은 듣는다. 그리고 창밖이 어둑어둑해지자 한 명이 ‘참 음악 좋네’라고 중얼거리고 다른 한 명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밤이 되자 두 소년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방에 누워 둘은 제각기 방금 들은 기타 연주를 떠올리며 ‘우리들도 멋진 연주가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기타와 베이스로 함께 연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잠시 백일몽에 빠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설가는 결코 같은 곡을 함께 연주할 수는 없다.
작가의 아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내, 무라카미 요코는 여느 평범한 ‘작가의 아내’가 아니다. 그녀는 가장 든든한 파트너이자 친구이자 능력 있는 편집자다. 원고를 완성한 후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주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고, 아내 요코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담당 편집자에게 보여줄 수 있다. 작가 시절 초창기 때만 해도 하루키만큼 책을 좋아하는 요코가 “요새 왜 이렇게 읽을 만한 책이 없는 거야. 당신이 하나 좀 재미난 걸로 써봐요”라고 투덜대면 하루키는 “그래? 그럼 어디 마누라를 위해 하나 써볼까?”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플레이보이>인터뷰에서 자신은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남편으로서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애처가다! 하루키가 아내에게 먼저 원고를 제출하는 것은 그녀의 공정함을 믿기 때문이다. 요코는 제아무리 남편의 소설이라도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툭 던져버리는 스타일이다. 안으로 팔을 굽히지도 않고, 눈치도 전혀 보지 않았다.
‘소년다움’
고통과 자기 치유라고 하는 것은 『양을 쫓는 모험』 이후 무라카미의 작품을 관통하는 큰 주제였다.
“제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끌어안고 사는 일종의 암흑 같은 것이에요. 나는 그것들을 진지하게 관찰해서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그대로 리얼하게 쓰고 싶어요. 해석하거나 설명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