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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적 사회현상과 개념의 범람, 이에따른 인식과 사유의 과정과 메타사고의 비중

by 까르멘 2017. 8. 14.

 

 

창세기적 사회현상과 개념의 범람, 이에따른 인식과 사유의 과정과 메타사고의 비중

 

 

창세기가 아니라 일종의 비유로서 창세기적 어떤 흐름의 태동기에는 많은 사물이나 개념들이 탄생한다. 인간사회에서 그것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개념이나 현상에 대해 지칭하거나 설명되어지는 언어가 필요하다. 

 

 

 

 

자신의 자서전을 쓰고 싶어하는데 인생이 책 몇권은 충분히 나올거라 호언장담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처음 자서전 작업을 하려고 쓰려면 막막하기도 하고 정리가 안되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도 몰라 몇줄 쓰고 관두는 경우도 많다. 그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멈추면 그의 인생은 몇줄로밖에 설명 안되는 인생으로 정리되고 만다. 언어로 정리되기 이전의 사유와 인식은 대부분 흩날리는 담배연기와 같이 허망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끈기있게 성찰하고 정리해서 소책자로 정리되면 진일보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만 그 과정은 어떤 책이든 쓰여지게 되는 것이 다들 그러하듯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일생을 다시 인식하고 명명하고 몇가지의 흐름이나 주제로 일관되게 자신의 탄생과 성장 굴곡을 정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건들이나 사유들, 그것들을 인식하고 사유하여 언어로 정리하고 이름을 부여하고 재조명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의 인생은 재탄생하게 되고 정리되며 다시 인생의 그 다음장을 시작할 원동력을 얻게 된다. 

 

 

 

 

또한 마찬가지로 무언가가 기존 인간사회 속에서 태동하여 범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때는 기존의 학계의 언어나 예술계의 언어로 설명되어지기에는 이미 공허해진다. 다양하게 태동하는 현대 사회의 범람하는 현상에 대해 기존의 분석 잣대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기에는 이미 역부족인 상황이 다가온다면, 아니다. 세상에 관심이 많고 또한 업으로 세상을 메타언어나 메타적 사고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밥벌이의 근원이 흔들리는 때가 이미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존재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사유의 흐름들에 대한 반성이나 탐구(메타사고?)보다는 태동하는 세상의 움직임에 대한 1차적 인식, 직관이 충분히 누적되어야할 필요가 더 커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타사고는 실체에 대한 혹은 실체로 인식되거나 사유되는 개념들에 대한 2차적 사고인데 지금은 그 근간인 실체나 실체에 관한 인식들과 사유들이 새롭게 범람한다고 생각한다. 메타사고는 이들에 대한 정 이후에야 메타사고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 도움을 줄 것만 같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은 1주일동안 세상과 세상 속에서 사는 생명체들을 만들고 그 각각에 이름을 부여하였다. 태동하는 무언가가 가득해보이는 현대에는 그것들에 명명하는 그래서 인식과 직관을 하는 그런 1차적인 작업과 사유가 필요해 보이며, 기존사회나 삶, 기존에 존재하던 사유나 개념들을 설명하는 데에만 충분히 능숙한 기능을 하였던 메타사고가 기존처럼 전면에 나선다면 공허한 실체가 없는 무언가밖에 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유와 인식의 순서는 아닐까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 모순되게도 이글 또한 메타사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족하고 허점이 많은 글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본론에서 지칭한 메타사고가 어떤 유형의 사고를 지칭하는지는 짐작을 할 것이라고 천진난만한 상상을 하며 이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