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고 인상깊은 부분을 발췌하며

까르멘 2020. 5. 7. 09:43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

읽고 인상깊거나 공감되는 부분들을 발췌하였습니다.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Epilogue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296page~297page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짱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날, 건달의 세월을 견딜 줄 알았고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Memory L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