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1219 엔도 슈사쿠 의 <예수의 생애>를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을 발췌하며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 있어도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소개할 책은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입니다.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작가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기도 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저서 중 <침묵>다음으로 유명한 <예수의 생애>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후속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 두 책이 합본인 <예수, 그리스도>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많은 오해 속에 소용돌이 속에서 고독했던 예수의 생애를 정리하고 서술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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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저자:엔도 슈사쿠
99p
그들이 예수를 따르게 된 동기 역시 각각 달랐겠지만, 군중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예수를 민족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라는 고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의 인기가 점차로 높아짐에 따라 더욱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구체적 기대가 산상 설교에서 거부되자 제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101p
민중들이 예수에게 품고 있던 열렬한 기대가 무너진 만큼, 그에게 환멸과 증오를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 또한 민중들의 이러한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갈릴래아에서 보낸 반년 동안 사람들에게 에워싸이고,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사람들이 환성을 올리며 맞이했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중략)
예수는 이 반년 동안 사람들이 결국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만을 추구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그는 사랑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지만, 이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제자들마저 그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도 민중도 ‘사랑’이 아닌 ‘현실적인 것’만을 요구했다. 맹인들은 눈을 뜨게 되길, 절름발이는 걸을 수 있길, 나병환자는 병이 치유되기만을 바랐다.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가 행한 수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가 정말 이 기적을 행했는지에 대한 통속적인 의문보다는 군중이 요구한 것이 오직 기적뿐이었다는 슬픈 사실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표징’을 요구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묵묵히 고개를 숙인 예순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 (중략)
그는 나병 환자나 불구자의 손을 잡으며 그들의 고통을 떠맡기를 바랐다. 예수의 바람은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병 환자도 불구자도 단지 치유되기만을 바라며 예수에게 매달렸다.
109p
그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 변화한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를 위해 힘든 여행과 박해를 견디어 내며 그의 말을 곳곳에 전했다.
..... (중략)
이 놀라운 변화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무력한 사람’인 예수가 그들에게 남긴 흔적이 그렇게 그들을 만든 것일까? 만일 성경을 예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제자들을 주인공을 읽으면, 나약하고 비겁한 겁쟁이었던 이들이 어떻게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을까하는 주제로 옮겨 간다. 더불어 이들의 놀라운 변화야말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주제이자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176p
수개월 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온 예수였지만, 때가 다가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사랑을 위한 그의 죽음은 그 어떤 죽음보다도 비참하고 초라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반대로 오해하고 있는 이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은 고통스러운 행위이다. 또한 영웅적이고 멋진 최후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오해 속에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며 죽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행위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곧 닥칠 죽음이 영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람들의 오해와 비웃음, 모욕 속에 떠돌이 개보다도 훨씬 처참하게 죽어 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통스러웠다.
206p
수난 사화 이전의 예수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영광스러운 존재였다. 병사들의 채찍질과 군중의 조소나 모욕을 받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능력하다는 것에 오히려 참다운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불어 곧 언급할 ‘부활’의 의미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무력한 것’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무력한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215p
사람들은 ‘어떤 것’을 예수에게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 대해 응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하며 그를 저버렸던 것이다.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일까? 미흡하지만 나는 이 점에 대해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관망해 본다. 갈릴래아에서 사람들은 그를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삼고자 했으며, 반로마 운동의 메시아로 떠받들고자 했다. 이러한 그들의 기대에 예수는 부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산상 설교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예수에게 기적만을 요구하려 했다. 갈릴래아를 배경으로 한 많은 기적 이야기를 읽어 보면, 우리는 그 ‘기적’이라는 것이 예수에게서 흘러넘치는 사랑에 비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만을 요구하려 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며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243p
제자들은 그들의 조상이 은밀히 읊던 이 이사야서의 ‘처참한 구세주’의 이미지를 예수의 생전에는 거의 생각한 일이 없었다. 다른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메시아란 능력 있고 위엄에 차 있으며, 이방인에게 빼앗긴 이스라엘 땅과 민족의 긍지를 되찾을 영광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력한 예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예수의 비참한 죽음은 제자들에게 근본적인 가치 전환을 촉구했다. 이것이 예수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었을까? 이것이 예수가 그 짧은 생애를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것이었을까? 아마 제자들은 이때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카야파 관저에서, 의회의 사제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다는 가책, 굴욕감, 자기변명은 스승에 대한 통곡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슬피 울었을 것이다.
그들은 생전의 스승의 얼굴과 모습을 떠올렸다. 매우 지치고 쑥 들어간 눈매, 그 눈매에 슬픔의 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미소를 띈 그 눈에는 순박한 빛이 머무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 이 세상에서 무력했던 사람, 야위고 볼품없던 사람, 그는 단지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것을 못 본 체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울고 있는 여자들과 고독한 노인 곁에 묵묵히 머물렀다. 기적 같은 것은 행하지 않았지만, 기적보다도 훨씬 깊은 사랑이 그 휑한 눈에 흘러넘쳤다. 그는 자신을 저버린 이, 자신을 배신한 이에게 원망의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슬픈 인간’으로, 제자들의 구원만을 간구했다.
245p
예수는 죽었지만 자신들 옆에 있다고 하는 생생한 감정이 어느 사이엔가 제자들에게 생겨났던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체적인 감정이었다.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라는 감정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비열한 배신행위에 대해 노여움이나 원한을 품지 않고, 도리어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제자들로서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가운데 그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유다 역사에 등장한 왕이나 예언자 가운데서도 그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가 아직도 자신들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는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죽은 어머니가 늘 옆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리라 할 수 있다.
246p
그런데 우리는 다시 수수께끼에 부딪친다. 앞에서 썼듯이, 회한과 자신들을 용서해 준 예수에 대한 감동과 사모의 감정, 이러한 제자들의 심리만으로는 그들이 그 후에 남은 생을 바쳐 모든 고난을 극복하며 선교에 힘썼던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제자들과 같은 나약한 사람은 얼마 동안은 그러한 마음으로 지냈겠지만, 끝까지 그러한 마음을 지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간은 이따금 인간의 감동을 퇴색시키고 처음의 결의를 잊게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무력한 예수’를 단순히 덕망 있는 사랑의 사람으로 여길 뿐,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신격화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교단의 지도자들의 경우, 죽은 후에 제자들에게 떠받들어졌지만, 예수처럼 신격화되지는 않았다.
257p
역자후기
엔도는 <예수의 생애>에 이어서 1978년에는 무력하게 죽은 예수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부활되었으며 인간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었고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저술한 <그리스도의 탄생>을 신쵸샤에서 출간하였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의 합본인 <예수,그리스도>가 5년 후인 1983년 신쵸샤에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