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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을 발췌하며

by 까르멘 2026. 1. 20.

20260120 임경선의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을 발췌하며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 있어도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소개할 책은 임경선의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입니다.

 

임경선 작가의 다양한 에세이와 소설들을 읽어왔는데, 많은 공감을 데려다주고 차분한 어조를 통한 삶의 지혜를 찬찬히 기술해나가는 작가로 기억합니다. 벌써 24권의 책을 출판했다니 새삼 놀라게 되었네요. 임경선 작가의 유료강연에도 참여하여 다양한 저서에 작가 사인도 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2000년경 교류하였던 가까운 지인이 <전국민의 글쓰기 작가화>가 되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요즘 같은 SNS등이 활발한 시대에 그와 같은 소원은 어느정도 현실회되지 않았나 싶어요. 고퀄의 글은 못되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데에 관심을 가지고 시도하는 사람은 많아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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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의 얼룩

37p

 

10대 시절 마냥 행복했던 이들은 훗날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 각자의 방식으로 부대끼거나 상처 입거나 힘겹게 보낸 사람들이 나중에 자라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혼자 무거운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그 아이는 생각을 하거나 상상을 한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연하고 취약한 시절에 느낀 휘몰아치는 사랑의 감정이 그 사람의 토대를 만들고, 그 시절에 각인된 선명한 상처들이 평생에 걸쳐 얼룩을 남기지 않던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 그 상처를 치유하는 도구는 글쓰기인 것. 지금 우리를 쓰게 만드는 대부분의 이유는 예민했던 10대에 뿌리가 있지 않을까? 나 역시도 단순히 글감으로서의 특수한 성장담을 넘어 그 시절 내 자아에 스민 얼룩들이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에 오랜 시간에 걸쳐 불을 지펴 훗날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덜 외롭기 위해, 조금 더 이해받기 위해.

 

*나에게 재능이 있을까

56p

 

누마타는 마흔 살 생일을 기점으로 만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가업을 잇기로 결정한다.

 

청춘을 바쳤던 미쿠라야마 선생의 작업실을 마지막으로 걸어 나오면서 누마타는 속으로 되뇐다.

 

평생 만화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서 행복했다.

현실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만화 속에서만 살아가고 싶었다.

만화가를 추구하는 동안은 특별한 사람일 수 있었다.

 

오랜 꿈을 이제야 놓아주는 누마타의 마지막 독백이 진하게 심금을 울린다.

 

60p

 

진짜로 간절하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내게 재능이 있을까?’라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재능이 밖으로 흘러넘쳤을 테고, 대부분 고만고만한 우리에게 재능은 있고 없고의 문제라기보다, 여러 가지 행동과 실천의 ‘결과’로서 어쩌면 중간부터 드러나는 무엇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저 너무 쓰고 싶으니까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목표 지점의 성취나 인정을 바라기보다 글쓰기 작업 자체를 일단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재능은 글을 쓰면 쓸수록 발견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후천적 재능을 만날 개연성이 커진다. ‘오래 버티는 것 자체가 재능이다’라는 말은 그런 측면에서 꽤 일리 있는 말이다. 시간이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흐르다 보면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재능의 경계선조차 흐릿해져간다.

 

*자기 의심과 믿음

83p

 

만화 《동경일일東京日日》에는 장발의 깡마른 젊은 만화가 ‘아오키’가 등장한다. 그는 상습적 ‘투덜이’로, 자신의 애매한 인지도와 인기가 늘 불만이다. “난 평생 고만고만하게 요 정도에서 끝날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작업한 새만화가 하루아침애 대히트를 친다. 인기 만화가가 된 기쁨도 잠시, 아오키는 마감을 앞두고 고향으로 잠수를 탄다. 담당 편집자 ‘하야시’가 시골 마을로 찾아가 대체 왜 그러냐고 묻자 아오키는 이제 만화를 그만 그리고 싶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세계는 적성에 안 맞고, 자신이 속 빈 강정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만화가 잘 팔리고 나서야 겨우 자각했다고. 얼마 안 가서 그 사실이 들통날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고.

 

-중략-

 

무뚝뚝하지만 지혜로운 담당 편집자 하야시는 ‘당신은 그만한 인기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말로 자신이 담당하는 만화가를 추켜세우지 않는다. 대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그래도 만화 그리는 거 좋아하시잖아요”라며 그의 가장 깊숙이 있는, 변치 않는 진실을 살포시 짚어준다

“......”

아오키는 제 발로 다시 작업실로 돌아간다.

 

*질투와 모멸감

95p

 

글을 쓰는 동안에는 종종 자신감이 없고, 외롭고, 많은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저자들을 만나면 반가워서 고충과 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같이 달리다가 누가 먼저 훌쩍 앞서가기라도 하면 겉으로는 축하해도 마음이 복잡해진다. 질투라는 감정은 정직하게 내 욕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해준다. 작가 대부분은 어느 단계에선가 극심한 질투의 괴로움에 시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질투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면 상대가 가진 걸 욕망하지 않게 된 것인데, 상대의 성취가 내 지향과 맞지 않음을 알게 되었거나 내가 그 간극을 메꾸며 그사이 더 나은 상황이 되었다면 담담할 수 있다. 질투에서 가장 멀리 있는 길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더 긍정하게 되었을 때나 최선의 글을 써냈다는 충족감이 있을 때에만 한시적으로 가능하다.

 

*미친 사랑에 대해 쓰는 사람들

168p

 

미친 사랑일수록, 지독한 사랑일수록 좋은 이야기가 된다. 그래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평소와 다른,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친 짓들, 아니 모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약해지고 무방비해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몹시 인간적이다. 평소엔 강한 척, 괜찮은 척 담담하게 살아가다가도, 사랑하게 된 사람에게 마음속의 연한 부분을 드러내고야 마는 주인공들에게 마음이 간다. 그들은 스스로 약해지고 낮아지는 것에 대해 행복해한다.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만나 완전한 무언가를 좇으려고 애쓰는 무모함도 짠하고 아름답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사랑은 다양하게 복잡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상대에 대한 경멸이나 환멸,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지르고 마는 비루함과 자기 파괴성 등 사람은 어찌나 쉬이 미친 상태가 되는지. 사랑만이 주는 고통의 특수성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대부분의 고통은 한번 겪으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지만 사랑은 호되게 겪은 후에도 겁 없이 다시 마음을 연다. 사랑이 무척 고통스러웠던 만큼 그만큼의 황홀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면서 마음 깊숙이 숨겨진 진심을 찾아가는 주인공들의 진심어린 사랑은 늘 어딘가 아프기 마련이다.

 

*작가와 소셜미디어

221p

 

팔로워가 많은 사람들은 그런 번거로움과 불안함이 싫어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치솟을 때가 있다. 쓰고자 하는 욕망이 두려움을 넘어선는 순간이다. 쓰고 싶은데 쓰지 않고 속으로 삭이는 건 글 쓰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운 일. 입을 꾹 다물고 자괴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자신에게 정직해서 미움받는 편이 낫다는 압도적인 감정에 휩싸이면 사람은 글을 쓰게 죄는 것 아닐까. 비판이나 비난으로 돌아와도 거기서 또 많은 것을 느끼고 얻게 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깡’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251p

 

이제는 더 이상 재능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재능의 확신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타인의 인정이 주는 달콤함과 비교나 인정 욕구에 휘둘리는 것도 고단하게만 여겨진다. 저술업의 세계에 있기 마련인 경쟁과 질시, 상대적인 초라함과 자괴감, 책을 둘러싼 ‘산업’의 민낯이 가끔은 속을 시끄럽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동안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내 것이 아니어도 귀한 재능을 알아보는 경이, 어떤 작품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느끼는 서늘한 감동, 작업하면서 느끼는 신성한 몰입 같은 것. 나는 이미 아름다운 순간들을 더 마주하고 느끼고 싶다. 밀림 속의 짐승처럼 주변의 모든 소리와 움직임, 진짜와 가짜를 숨죽이며 가만히 지켜보고 싶다.

얼마나 더 오래 글을 쓸 수 있늘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들뜨지 않고 주제 파악을 잘하면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아주 조금씩 더 잘 써나가고 싶다. 나머지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