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창조경제와 안철수의 새정치의 유사성과 차이점 그리고 리더쉽
박근혜의 창조경제와 안철수의 새정치는
공모전을 통해 싼값에 제안서나 기획안을 얻어먹는 것과 같다.
아이디어가 정책에 반영되면 아이디어 제공자는 일순간 의견이 채택되어 뿌듯할 수도 있으나
싼값에 힘든 정신노동을 하여 사기성 착취를 당한 꼴이 된다.
조금 똘똘한 사람이라면 이용 당했구나!하고 분통해 할 수도 있다.
돌아오는 떡고물은 얼마 안되는데 수장의 실적을 채워주는데 일조하고 버림받는구나하고 여길 수도 있다.
이런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창조경제든 새정치든 논공행상을 통해
기발하고 시효적절한 아이디어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수장의 명예를 드높힌 데에 조금이라도 일조한
모든 기획안과 제안서에 합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크고 작은 불만이 높아져 수장에게 팽당하고 마는구나라는 생각에 따르던 추종자마저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공모전이란 것은 기업에서 대학생이나 일반인과 같은 사람들,
즉 아마추어들에게 참신한 아이디어를 받고 수상 및 사례금을 주고
저작권은 기업에 귀속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추어들은 잠깐의 상금과 이력서에 한 줄 넣을 수 있는 일을 해냈다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업에 귀속된 저작권으로 인해 기업이 주력사업으로 추진하고
그로인해 잠깐의 아마추어의 흥분에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의 사회적 이슈와 수익창출을 하게 된다면
아마추어들은
아... 이 사업아이템은 내가 킵해두었다가 창업해서 추진했으면 내가 받게 될 스포트라이트이고 수익이 될텐데,
내가 대기업들처럼 갖고 있는 기반이 부족해 대기업 좋은 일만 시켰구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서커스단장이 다 버네 난 말 못하는 곰이라 인터뷰도 서커스단장이 다 하고
어떻게 조련시켰나요? 대단하군요!하고
포털싸이트에 실시간 검색어순위 1위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진다.
곰은 일간지에 사진만 잠깐 실리고 처우는 그대로 주는 사료 받아먹고
무용수가 발이 망가지도록 하루종일 연습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 된다.
이 무용단이나 서커스단은 단장이 시스템을 구축하고 내가 자본을 투자하여 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자본적 우위에 있는 내가 수익을 더 많이 갖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주장하면 분하지만 곰은 말할 여지가 확 줄어든다.
곰은 어차피 숙식제공에 사료만 먹으면 되지 돈 쓸 일이 어디에 있냐며
그냥 이대로의 처우로 살아도 되지 하고 주장한다면
자본주의사회에 할 말이 더더욱 없어지게 된다.
이에 분노한다면 투쟁을 해야한다. 알아서 논공행상해주겠지라고 기대하다가는 영 꽝이 되고
이래서 노조라는것이 생겨났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일 것이다.
허나 서커스단의 곰이 재주를 넘고 돈과 명예는 서커스단장이 벌어들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 인간세상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요인때문에 발생한다.
로댕과 까미유끌로델의 관계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적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대표사례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에너지가 소모되고 닳아버리더라도 사랑이 있다면 희생하고 헌신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인간세계에는 존재한다.
이 관계는 까미유끌로델의 로댕에 대한 혹은 상호간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관계였다.
이것 사랑, 팬심은 로댕의 리더쉽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매력, 예술적인 감각, 능력, 재력,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힘,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사회에서는 사람의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것을 포장하여 말하면 리더쉽이라고도 한다.
박이나 안이나 창조경제나 새정치나 리더쉽의 스타일일 뿐
그것 자체가 구체적 정책이 확립된 알맹이가 있는 컨텐츠가 있는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책이나 사업아이템과 같은 컨텐츠를 수용하는 스타일을 리더로서 제시한 구호라고 본다.
마치 기업에서 공모전을 열어 기획안이나 제안서를 받아 수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리더쉽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에 대해 좀더 적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박근혜는 그 아이디어 수렴의 근원인 리더쉽의 근원이 주로 아버지의 후광이며
이것 또한 탈렌트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별로 없어질 수도 있다.
물려받은 후광도 강점이라면 강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삶에서 대부분의 추종자를 이끌어내는 힘의 원동력은 후광이었다.
박근혜는 박근혜 자신보다는 후광에 좀 더 비중을 두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탕으로 정치력과 리더쉽을 발휘하였고
자신을 도와줄 정치적 참모와 정략들 그 외 정책, 아이디어를 수렴하여 여기까지 헤쳐나가며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안철수는 기업가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수성가하면서 사회에 기여하여 왔고
공익적인 마인드를 바탕으로 삶을 살아왔기에 그에 바탕으로 하는 본인 스스로의 덕성? 매력?으로
안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려는 조력자를 많이 구할 기회를 마련해왔다.
리더쉽의 사용성향에 있어 박이나 안이나 포스트모던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사적인 모던함이라기 보다는 아랫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조력자를 구한다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던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박은 우리가 남이가?의 구태적이고 패거리주의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모던한 사람들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파벌을 형성하였고
안은 파벌이라기보다는 정책과 아이디어를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무리를 지을 뿐 배타적 파벌을 형성하고는 있지 않다.
그래서 유연하고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실시간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건강한 조직(?), 무리를 이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참고로 민주당이나 이석기 김재연은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구태적 패거리주의를 여실히 보여주어
국민들이 실망을 하도록 하고 있다.
대동단결이란 말로 포장될 수도 있는 판타지적 패거리주의는
최고 수장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부리기 쉽고 관리하기 쉽겠지만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자본주의 속의 국민들이 대동단결해봐야 곰처럼 재주나 부릴 뿐이다.
2013.05.14.까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