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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점 기세춘 선생의 <장자>에서 인상깊은 부분 발췌.(外篇외편)

by 까르멘 2013. 7. 3.



外篇


제8장 변무


8-3

작은 미혹은 나라를 바꾸고, 큰 미혹은 천성을 바꾼다.

어찌 그런 줄을 아는가?

순임금이 인의로써 천하를 어지럽힌 이래

천하는 인의를 억지로 따르도록 교화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것은 인의로써 천성을 바꾸어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삼대 이후의 임금들은

사물로써 사람들의 본성을 변화시켜 놓지 않은 이가 없었다.

소인은 이를 위해 몸을 죽이고

대부는 가문을 쫓아 몸을 죽이고

성인은 천하를 쫓아 몸을 죽인다.

이들 여러 사람은 사업이 같지 않고

명성도 달리 호칭되지만

본성을 해쳐 몸을 죽게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장과 곡 두 사람은 더불어 양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다 같이 양을 잃어버렸다.

사정을 물었더니 장은 책을 끼고 독서를 했고

곡은 윷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사업은 같지 않지만

그들이 양을 잃어버린 것은 동일하다.

백이는 수양산 아래서 이름을 위해 죽었고

도척은 태산 위에서 이익을 위해 죽었다.

두 사람이 죽은 것은 달라도

생명을 해치고 천성을 상하게 한 점은 같다.

그런데 왜 백이는 옳고

도척은 그르다고 하는가?

천하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인의를 위해 몸을 죽이면

군자라 하고,

재물을 위해 몸을 죽이면

소인이라 한다.

목숨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것은 다 같은데

군자가 되기도 하고, 소인이 되기도 한다.

생명을 죽이고 천성을 해친 것은

도척도 백이도 마찬가지인데

또 어찌 군자와 소인으로 차별을 두는가?


8-4


또한 본성을 인의에 결부시키는 것은

유가들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내가 말하는 선은 아니다.

본성을 오미에 결부시키는 것은

맛의 달인 유아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이른바 내가 말하는 선은 아니다.

본성을 오성에 결부시키는 것은

소리의 달인 사광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이른바 내가 말하는 귀 밝음은 아니다.

본성을 오색에 결부시키는 것은

눈 밝은 이주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이른바 내가 말하는 눈 밝음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선이란 인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덕성을 선하게 하는 것뿐이다.

내가 말하는 선이란

인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성과 천명대로 방임하는 것뿐이다.

내가 말하는 귀 밝음이란 저들의 귀로 드든 것이 아니라

자기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눈 밝음이란 저들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대저 스스로 보지 않고 남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남으로 만족하는 것은

남의 만족으로 만족할 뿐

자기의 만족을 스스로 얻지 못하는 자들이며,

남들이 가는 곳으로 갈 뿐

자기의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자기 기을 가지 못한 것은

도척과 백이가 다 같으며

거짓되고 치우친 것이다.

내가 죄와 허물을 묻는 것은 도와 덕에 대해서다.

그래서 위로는 감히 인의를 고집하지 않고

아래로는 지나치고 편벽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제9장.馬蹄마제

9-2


그런데도 대를 이어 칭송하기를

백락은 말을 잘 다스렸고

도공과 목공은 진흙과 나무를 잘 다스린다고 말한다.

이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잘못이기도 하다.

내 생각으로는 천하를 잘 다스리는 것은 그렇지 않다.

저들 민중에게는 자연의 변하지 않는 성품이 있다.

베를 짜서 입고, 밭을 갈아먹으니

이것을 ‘대동사회의 덕’이라고 말한다.

하나같이 평등하고 집단에 묶이지 않으니

이것을 ‘자연의 해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덕이 지극했던 세상에서는 거동이 편안했고

생활이 순박하고 한결같았다.

그 당시에는 산에는 길이 없었고

못에는 배와 다리도 없었고

만물이 무리 지어 살듯이

사람들은 마을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살았고,

금수는 무리를 이루고 초목은 잘 자랐다.

그러므로 금수에 굴레를 씌워 같이 놀 수 있었고

때까치 둥지에 올라가 엿볼 수도 있었다.

덕이 지극한 세상에서는 금수와 더불어 살았고

가족처럼 만물과 어울려 벗이 되었으니

어찌 군자와 소인의 차별을 알겠는가?

똑같이 무지했으니

그 덕을 잃지 않았고

똑같이 무욕했으니

소박하다고 말하며

소박했으므로 백성의 성품은 덕성스러웠던 것이다.


제10장. 胠篋거협


10-3


냇물이 마르면 골짜기가 텅 비듯

언덕이 무너지면 연못이 메인다.

성인(군왕)이 죽어버리면 큰 도둑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천하는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도 그치지 않을 것이니,

성인을 중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둑을 거듭 이롭게 하는 것이다.

말과 되를 만드는 것은 수량을 재기 위함인데

그러면 말과 되까지 훔쳐버릴 것이며,

저울과 추를 만드는 것은 무게를 달기 위함인데

그러면 저울과 추까지도 훔쳐버릴 것이며,

부절과 옥새를 만드는 것은 신표로 삼기 위함인데

그러면 부절과 옥새까지 훔쳐버릴 것이며,

인의를 만드는 것은 이로써 교정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인의마저 훔쳐버릴 것이다.

무엇으로 그럴 줄을 알 수 있는가?

낚시바늘을 훔친 놈은 죽임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놈은 제후가 되는데,

제후가 되면 가문에 인의가 몰려드니

이는 곧 도둑놈이 인의와 성지를 훔친 것이 아닌가?

이처럼 큰 도둑이 되어 제후를 훔치고,

인의를 훔치고,

말과 되, 저울과 추, 부절과 옥새의 이로움까지 훔치면

고관대작을 상품으로 준다 해도 권면할 수 없고

사형의 위협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도척을 거듭 이롭게 할 뿐

그것을 막을 수는 없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잘못이다.


제12장 天地천지


12-10

장려면이 계철을 알현하고 말했다.

“노나라 군주께서 제게 가르침 받기를 청했습니다.

사양했으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어 말해 주었지만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제가 한 말을 검토해 주십시오!

제가 노나라 군주에게 드린 말씀은 이렇습니다.

‘의복은 반드시 공검해야 하고

공정하고 충성스런 자를 발탁하며

치우치고 사사로움이 없다면

민중은 누가 감히 화목하지 않겠습니까?‘“

계철은 쿡쿡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제왕의 덕에 대한 그대의 말은 마치 사마귀가 성난 팔로

수레바퀴에 대적하는 것 같소.

그런즉 반드시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이와 같이 한다면 그는 위험한 처지를 자초할 것이니

관망대에 관광 상품들을 진열하여

찾아오는 발걸음이 많아지게 할 뿐이오.“

장려면은 호랑이 눈망울이 되어 놀란 듯 말했다.

“저로서는 선생의 말슴이 막막할 뿐입니다.

그러니 원컨대 선생께서 그 가르침을 설명해 주십시오.“

계철이 말했다.

“위대한 성인이 천하를 다스림은

민심을 자유롭게 뒤흔들어(무지를 일깨우는 반어)

그들 스스로 교화를 이루고 습속을 바꾸게 하여(산파술),

그 도적의 마음을 들춰내어 없애고

모두 자주적 의지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오.

마치 민중의 본성이 스스로 하는 것 같아서

민중은 그렇게 된 까닭을 모르오.

이와 같이 하는 자가 어찌 요순의 교화를 형으로 삼고

혼돈 태현의 기를 아우로 삼겠소?

혼돈 자연의 덕에 동화하여

마음이 편안하기를 바랄뿐이오.“


12-11


자공이 남쪽으로 초나라에서 유세를 마치고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한음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한 장부가 밭두렁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물길을 내고 우물에 들어가

옹기그릇을 안고 나와 물을 대고 있었다.

열심히 하지만 힘은 많이 들고

나타나는 성과는 적었다.

자공이 농부에게 말했다.

“만약 기계를 쓴다면

하루에 백 두렁의 밭에 물을 줄 수 있습니다.

힘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클 터인데

왜 그것을 쓰려고 하지 않는지요?“

농부는 고개를 들고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오?”

자공이 말했다. “나무를 뚫어 기계를 만든 것인데,

뒤는 돌을 매달아 무겁고 앞의 두레박은 가벼워

물을 손으로 잡고 잡아당기는 것 같아서

빠르게 줄을 당기면 물이 끓어 넘치듯 합니다.

그 이름은 용두레라고 합니다.“

농부는 성난 듯 얼굴색이 바뀌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선생에게서 들은 말인데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를 부리는 자가 있고

기계를 부리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의 마음이 생기고

가슴속에 기계의 마음이 생기면 순백의 바탕이 없어지고

순백의 바탕이 없어지면 정신과 성품이 안정되지 못하고

정신과 성품이 불안정하면

도가 깃들 곳이 없다고 했소.

내가 두레박 기계를 몰라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쓰지 않는 것이오.“

자공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머리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한참 있다가 농부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자공이 답했다. “공자의 제자입니다.”

농부가 말했다.

“그자는 박학으로 성인 흉내를 내며

그럴듯한 거짓말로 대중을 패거리 짓고

홀로 거문고를 뜯고 슬픈 노래를 부르며

천하에 명성을 파는 자가 아닌가?

그대가 지금 자신의 신기를 잊고

제 몸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대는 도에 가까울 것이오.

그런데 자신의 몸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린다 하겠소?

그대는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어서 가게나!“

자공은 비참하게 얼굴빛을 잃고

머리를 숙이고 의기소침하여

삼십 리쯤 길을 가고 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12-12


자공의 제자가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잉ㅂ니까?

스승은 어째서 그를 보고 얼굴빛을 잃고

종일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까?“

자공이 말했다.

“처음에는 천하의 한 도인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내가 공자에게 들은 것은

공적이 될 만한 것을 이루기를 바라고

힘을 적게 들이고 실적은 많은 것이

성인의 도라고 들었다.

지금 그 무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를 지킨 자는 덕이 온전하고

덕이 온전한 자는 형체가 온전하고

형체가 온전한 자는 정신이 온전하고

정신이 온전한 것이 성인의 도다.

생명에 맡기고 백성과 더불어 갈 뿐

그 가는 곳을 모른다.

아득하여 말로 할 수 없구나!

순박하게 자연을 따를 뿐이다.

공적, 이익, 기계, 기술은

반드시 그 농부의 마음에서 잊혀졌다.

그 농부 같은 사람은 자기 뜻이 아니면 가지 않고

자기 마음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비록 천하를 주어 기리며 말하는 대로 얻는다 해도

오만한 듯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천하가 그를 비난하여 온전한 덕을 잃었다 해도

태연한 듯 응대하지 않는다.

천하의 비난과 기림도 그를 덜고 더함이 없으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덕인이라 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풍파에 흔들리는 백성일 뿐이다.“

노나라에 돌아와서 공자에게 보고하자 공자가 말했다.

“그는 혼돈씨의 방술을 빌려 수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안은 다스리지만 밖은 다스리지 못한다.

대저 밝은 지혜와 검소에 들어가고

인위가 없고 자연으로 돌아가며

본성을 체현하고 정신을 품고 세속에서 노닐었다면

네가 어찌 놀랐겠는가?

저 혼돈씨의 방술을

나와 네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12-14

문무귀와 적장만계가

무왕의 군사를 관찰했다.

적장만계가 말했다.

“순임금의 예치에 미치지 못하구나!

그러므로 정벌의 환란이 따라붙는 것이다.“

문무귀가 물었다.

“천하가 고르게 정돈되어 있었기에

순이 다스릴 수 있었는가?

아니면 어지러운 이후에 그것을 다스렸는가?“

적장만계가 답했다.

“천하가 고르게 정돈되어 소원대로 되었다면

어찌 순을 세워 다스리고자 했겠는가?

순은 상처가 난 이후에 약을 발라준 것이다.

대머리가 되었으므로 가발을 쓰고

병이 났으므로 의사를 구하는 것이다.

효자가 약을 지어 부모를 치료하느라

안색이 초췌해진 것을

성인은 부끄럽게 여긴다(미리 병나지 않게 보양 못 했으므로).

지극한 다스림이 있었던 고대 원시 공산사회에서는

어진 자를 높이거나 능한 자를 부릴 필요도 없었다.

윗사람이란 표준일 뿐이었고 백성은 야생의 사슴이었다.

단정했으나 의를 행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서로 사랑했으나 인을 행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성실했으나 충을 행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합당했으나 신의를 지켰다고 깨닫지 못한다.

준동할 때 도우러 갔으나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행적도 자취가 없고 사업도 전해짐이 없다.“


제13장. 天道천도


13-4

대저 제왕의 덕은 천지를 머리로 삼고

도덕을 주인으로 삼고, 무위를 상도로 삼는다.

무위하면 천하를 부리고도 남음이 있고

유위하면 천하의 부림을 삼기에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무위를 귀하게 여겼다.

윗사람이 무위하고, 아랫사람 역시 무위하다면

상하의 덕이 같게 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덕이 같으면 신하가 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유위하고, 윗사람 역시 유위하다면

상하의 도가 같게 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도가 같으면 군주 노릇을 못한다.

윗사람은 반드시 무위함으로써 천하를 부리고

아랫사람은 반드시 유위함으로써 천하의 부림이 된다.

이는 바꿀 수 없는 도리다.

그러므로 옛날 천하를 호령한 사람들은

비록 지혜가 천지를 덮을지라도 스스로 꾀하지 않았다.

변론이 만물을 두루 미칠지라도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재능이 해내를 궁구할 수 있을지라도

스스로 다스리지 않았다.

하늘이 만들지 않더라도(무위) 만물은 스스로 조화하고

땅이 기르지 않더라도(무위) 만물은 스스로 자란다.

제왕이 다스리지 않더라도(무위) 천하는 공적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자연)보다 신묘한 것은 없고

땅보다 부한 것은 없고, 제왕보다 큰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제왕의 덕은 천지와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천지를 타고 만물을 베풀고

사람이 무리짓게 하는 도이다.


제14장. 天運천운


14-9

(사금의 말)“또 그대는 두레박틀을 보지 못했는가?

줄을 끌어당기면 도리어 내려가고

놓아버리면 두레박이 올라오는 것을!

그것은 사람들이 끌어당겨진 것이지

사람을 끌어당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올라오고 내려가더라도 사람에게는 죄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황오제의 예의와 법도는

똑같아서 숭상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수단이므로 숭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황오제의 예의와 법도는

아가위, 배, 귤, 유자 등 과실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각각 맛은 다르나 입에 맞는 것은 다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의와 법도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변하는 것이다.

만약 원숭이에게 주공의 옷을 입힌다면

원숭이는 반드시 물어뜯고 찢어버려야만

만족할 것이다.

고금이 다른 것은

원숭이가 주공과 다른 것과 비슷하다.

옛날 서시는 가슴 병이 있어

마을에 살 때 자주 눈을 찡그렸다.

마을에 추인이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자기도 가슴을 부여안고

눈을 찡그리고 다녔다.

마을의 부자들은 그것을 보자

문을 걸어 잠그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자

처자식의 손을 끌고 마을을 떠나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찡그린 모습이 아름다운 것만 알았지

그 까닭을 몰랐던 것이다.

가엽다! 공자는 참으로 궁색하구나!“


제17장.秋水추수


17-14

장자와 혜자가 냇물의 징검다리 위에서 놀았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한가롭게 헤엄치는 걸 보니

물고기가 즐거운 모양이오.“

혜자가 말했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그대는 내가 아닌데

어찌 내 마음이 모른다는 것을 나는가?“

혜자가 말했다.

“그렇소.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을 모르오.

마찬가지로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니까

정말 당신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해야 논리상 옳지 않겠소?“

장자가 말했다.

“질문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그대가 처음 나에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고 말한 것은

이미 그대는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서

나에게 반문한 것이오.

내가 물 위에서 지각한 것은

물속의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이었소.“


제21장. 田子方전자방


21-3

온백설자가 제나라로 가던 도중 노나라에서 묵었는데

노나라 사람들이 그를 알현하기를 청했다.

온백설자가 말했다. “만나지 않겠다.

내 듣건대 노나라 군자들은 예의만 밝았지,

인심을 깨닫는 데는 소견이 좁다고 하니

만나고 싶지 않구나!“

제나라를 들러 돌아오는 길에

다시 노나라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또 뵙기를 청했다.

온백설자가 말했다.

“지난번에도 나를 보자고 하고 이번에도 보자고 하니

이는 반드시 나를 깨우칠 일이 있는 모양이다.“

나가서 손님을 접견하고 들어와서는 탄식했다.

다음 날에도 손님을 접견하고 들어와서는 또 탄식했다.

그의 종이 물었다.

“손님을 접견할 때마다 들어와서는 반드시 탄식하니

어인 까닭입니까?“

온백설자가 답했다.

“내가 일찍이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노나라 사람들은 예의는 밝지만 인심은 모른다고.

아까 만난 자들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자로 잰 듯하고

그 태도는 용과 호랑이 같았다.

그들이 나를 타이를 때는 자식 같았고

나를 인도할 때는 어버이 같았다.

그래서 탄식한 것이다.“

공자가 그를 만나보고는 말이 없었다.

자로가 물었다.

“선생께서는 오래전부터 온백설자를 만나보기를 소망했는데

정작 그를 만나보고는 말이 없으니 어인 까닭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그 같은 사람은 눈으로 보자마자 도인임을 알 수 있거늘

다시 말로 권유할 필요가 있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