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집에 도착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모음집
<여자없는 남자들>을 다 읽었다.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법한 막장드라마적인
연애사가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초현실주의적인
서사시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현실과 끈을 놓지는 않지만
판타지적이고 몽환적인 줄거리가 전개되기도 한다.
대체로 속도감 있게 읽혔다.
단편소설들 중에서 몇구절들을 적어보고
그걸 독후감 대신하기로 할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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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마이 카'59p
가후쿠는 가죽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고서 신경을 한 곳에 집중해 그녀가 기어를 변속하는 순간을 감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모든게 너무도 매끄럽고 비밀스러웠다. 귀에 와닿는 엔진 회전음이 아주 조금 달라질 뿐이다. 오가는 벌레의 날개짓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그리고 멀어진다. 좀 자야겠다고 가후쿠는 생각했다. 한숨 푹 자고 눈을 뜬다. 십분이나 십오 분. 그쯤이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한다. 조명을 받고 주어진 대사를 한다. 박수를 받고 막이내려진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는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
'예스터데이'69p
그때까지 지나온 내 삶이나 내 생각도 돌이켜보니 참으로 범속하고 한심하기 짝이없었다. 대개는 상상력이 부족한 미들클래스 잡동사니였다. 죄다 한데 뭉쳐 큼직한 서랍 깊숙이 넣어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불을 붙여 연기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어떤 연기가 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전부 없었던 일로 돌리고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도쿄에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다. 나라는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게 간사이 사투리를 버리고 새로운 말을 익히는 것이란, 그러기 위한 실제적인(또한 상징적인)수단이었다.
'예스터데이'112p
스무 살이던 시절을 돌아보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외톨이고 한없이 고독했다는 느낌뿐이다. 나에게는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해줄 연인도 없었고, 흉금을 터놓고 대화할 친구도 없었다. 하루하루 뭘해야 좋을지도 알지 못했고, 마음속에 그리는 장래의 비전도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내 안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일주일 동안 거의 아무와도 말을 나누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런 생활이 일 년쯤 이어졌다. 긴 일년이었다. 그런 시기가 혹독한 겨울이 되어 나라는 인간의 내면에 귀중한 나이테를 남겼을지.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독립기관'140p
내게서 성형외과 의사의 능력이나 경력을 걷어낸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쾌적한 생활환경을 잃는다면,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한낱 맨몸뚱이 인간으로 세상에 툭 내던져진다면, 그때 나는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셰에라자드'174p
셰에라자드는 상대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화술에 능했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라도 그녀의 입을 통하면 특별해졌다. 말투도 그렇고 은근히 뜸을 들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는 듣는 사람의 흥미를 자아내고 심술궂게 애태우고, 고민하고 추측하게 만든 뒤에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적확하게 내주었다. 그 얄미울 정도의 기교는 일시적이나마 듣는 사람이 주위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찐득하게 남아 있는 불쾌한 기억의 조각들, 혹은 가능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걱정거리를 젖은 걸레로 칠판을 닦아내듯이 깨끗하게 지워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바라는 생각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지금 하바라가 무엇보다 원하는 것이었다.
'기노'238p
인간이 품는 감정 중 질투심과 자존심만큼 골치 아픈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노는 왜 그런지 그 양쪽 모두에서 심심찮게 곤욕을 치러왔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그런 어두운 부분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기노는 이따금 생각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