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
파파이스와 자취방과 동네까페에서 줄담배와 함께하는 독서중 묘하게 애착이 가는 구절들을 나열해보는 책의 재구성으로서 이 글을 올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트위터의 타임라인이나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를 리트윗하는 것이나 공유하기 좋아하기로 상대의 의견에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의사표현하는 편집의 방식과 유사한 측면으로써 발췌한 것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유를 찾기 힘든(언어로 설명되기 곤란한) 공감대를 일으키는 구절들을 발췌한다고 보면 또한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이렇게 긴 분량의 글을 올리거나 좋아요나 리트윗으로 의사표현을 하기에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점도 있고 생각날 때 독후감 대신으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며, 다시 찾아보기 좋도록 책의 페이지를 접어 놓는다는 것과 유사한 작업이라고도 생각되어 블로그에 올립니다.
이번에는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입니다.
17p
인간이 불행해지는 두 가지 방식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고(故)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 남겼다는 종교적 물음 24개 중의 하나다. 차동엽 신부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미학에서 ‘하마르티아’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시학>은 비극의 주인공을 이렇게 정의한다. “덕과 정의에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 니는 물론 ‘공포(phobia)’와 ‘연민(eleos)’이라는 비극의 효과와 직접 관련이 있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정의 속에서 ‘과실’로 번역된 것의 원어가 바로 ‘하마르티아’다. 연민의 감정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발생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하마르티아’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악의가 없는 ‘실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저지른 과오를 가리킬 거다.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악한 짓을 하다가 불행해졌다면, 주인공의 불행에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외려 그의 몰락에 통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50p
로봇 부처
영화 <인류멸망보고서>(2011)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불성을 가진 로봇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절에서 법당 청소나 시키려고 구입한 로봇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인간 신도들을 상대로 설법까지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절의 주지가 제작사에 이 로봇을 점검해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본사에서 엔지니어가 파견되나, 그는 로봇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로봇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외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영화 속 로봇의 날렵한 디자인은 외려 인간에게 호감을 주는 구간에 위치한다. 섬뜩한 느낌은 녀석의 생각과 행동이 기계의 한계를 넘어 과도하게 인간에 근접했다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런 유형의 로봇은 이미 영화<아이, 로봇>(2004)에 등장한 바 있다. 거기서도 대량생산된 로봇 중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건 그 녀석이 인간에게 근접한 사유와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인간을 닮은 로봇은 위험하다. 인간들은 과도하게 인간을 닮은 이 수행자 로봇을 제거하려 하나, 로봇은 인간의 손에 죽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살기 위함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은 로봇에게 이미 자신의 생사따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로봇은 스스로 작동을 멈추고 조용히 열반(?)에 든다. 여기서 로봇은 그저 인간을 닮은 수준을 넘어 인간보다 더 숭고해진다. 로봇이 부처가 된 셈이다.
73p
죽음 앞의 인간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자신이 조직한 사병 단체 ‘방패회’멤버들과 함께 도쿄에 있는 자위대 사령부에 난입한다. 자위대 간부를 인질로 잡은 뒤, 그들은 인질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자위대 병사들을 모아달라는 요구를 한다. 요구대로 병사들이 모이자, 그는 난간 위로 올라가 건물 앞의 병사들을 향해 쿠데타로 천황제를 부활시키자고 선동한다. 이 황당한 요구에 자위대 병사들은 그저 야유와 냉소와 모욕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거의 들리지도 않았을 몇 분의 연설을 마친 뒤 미시마는 건물 안으로 되돌아가 할복을 감행한다. 가이샤쿠닌(할복할 때 칼로 목을 쳐주는 사람)의 역할을 맡은 것은 모리타 마사가스. 하지만 다섯 번을 내리쳐도 미시마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의무 수행에 실패한 모리타가 고가 히로야스에게 칼을 넘겨준다. 그의 손에 미시마의 목이 떨어지자, 모리타 역시 미시마의 뒤를 따라 제 배를 가른다. 고가가 다시 한 번 할복자의 목을 베어 고통을 멈추어준다.
극적인 자살을 연출함으로써 일본사회를 감동시키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사건을 접한 일본 시민들의 태도는 건물 아래서 야유를 퍼붓던 자위대 병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건 직후에 이루어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 갑작스런 사무라이 문화의 복고에 이해와 공감을 표한 국민은 3퍼센트 가량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부분 일본인은 그의 자살을 ‘순국’이 아닌 ‘엽기’로,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인 마카브르(macabre)퍼포먼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생사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릴케(1875~1926)가 쓴 것처럼 현대인은 낭만적으로 죽을 수가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병이나 교통사고 따위로 죽는다. 거기에는 드라마라곤 없다. 생의 권태랄까.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죽을 만큼 강하지 않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상이나 대의 같은 게 필요하다.”
미시마에게는 죽음을 향한 자신의 성적 충동을 포장할 어떤 가치가 필요했다. 그는 “뭔가 명예로운 것을 위해, 어떤 대의를 위해 죽기를 원하나”, 이미 그가 살던 전후 일본사회는 “대의를 위한 의미 있는 죽음이 사라진 시대”였다. 이미 서구화한 일본에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개인의 감동적 드라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낭만적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운문적 죽음을 연출해야 한다는게 미시마의 가장 큰 실존적 문제였다.
‘내용’이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형식’만의 ‘순국’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시마의 자살은 철저히 유미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윤리적 곤궁에 처할 때마다 미학적 해결을 찾는 게 일본문화다. 미시마의 자살은 일본 특유의 유미주의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지극히 사적인 충동을 검열을 피해 ‘우국’과 같은 대의명분에 감추어 발산한 것은 실은 그다지 영웅적이지 못하다.
116p
예술, 죽음의 충동을 향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은 야전병원에서 복무하던 중 한 병사를 알게 된다. 이 사내는 전쟁이 현실이 아니라 세트장 안에서 벌어지는 허구라고 굳게 믿었다. 사내는 적의 포격이 시작되면 외려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데도 그의 몸에는 파편 하나 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 전쟁은 허구’라는 병사의 확신을 더 깊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미쳐버리기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 병사는 아마도 벌써 쇼크로 사망했을 것이다. 그가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로 도피한 것은, 결국 전쟁의 과도한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가 정치와 만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여기서 ‘광기’는 문명의 부정적 상태를 나타내는 ‘징후’이자, 동시에 그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라는 예술운동은 이로써 동시에 공산주의라는 정치운동이 된다.
브르통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문명의 스트레스, 특히 자본주의 문명의 억압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다. 자본주의는 살아 있는 것까지도 화폐가치로 환원하여 물화시켜버린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거대한 죽음의 문명이다. 게다가 세계대전을 통해 브르통은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새로운 것의 건설이 아니라, 외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의 ‘파괴’, 나아가 인간 자신의 ‘살상’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브르통은 그 넋 나간 병사의 ‘광기’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보았다. 잠수함의 토끼랄까? 광인의 ‘광기’는 파멸적 사회 상황의 정직한 증언이자, 그 상황에서도 삶을 유지하려는 처절한 의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광기를 통해 죽음의 문명인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브르통은 초현실주의가 공산주의 운동과 궤를 같이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그대로 초현실주의의 강령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 때문이다. 프로이트로 채색된 사적 유물론이랄까?
150p
우리가 잃어버린 것
진보와 개혁을 말하고자 하는 자라면 낡은 질서를 고집하는 이들보다 지성과 미감과 도덕성 측면에서 우월해야 한다. 하지만 감히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우리는 지성, 감성, 도덕성 면에서 사회적 평균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으면서 그저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근거 없는 ‘우월감’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바로 그 얄팍한 위선에 대한 반감이 민주적 에토스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것은 우리 바깥의 바리케이트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에토스인지도 모른다. 그 추위에 지팡이를 짚고 투표장에 나서는 노인들은 경멸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비록 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우리와 다르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그 열정만큼은 우리의 것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비천한 자들(레미제라블)’이다. 왜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협력자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혁명가(<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는 영화의 마지막에 반복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사가 살짝 바뀌어, 바리케이드 위의 사람들은 이제 ‘혁명’ 대신에 ‘사랑’을 노래한다. 배배 꼬인 눈에는 이것이 정치적 문제를 슬쩍 도덕적 문제로 환원시키는 가증스러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혁명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에는 분명히 어떤 깊은 울림이 있다. 혹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바리케이드 저 너머에도 연대해야 할 민중이 있다. 그저 바리케이드 저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들을 너무나 쉽게 적으로 돌려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거의 패배를 통해서 우리가 뼈저리게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바리케이드를 세우면서 기대했던 자유, 평등, 형제애의 세상은 바리케이드의 이쪽과 저쪽의 민중이 서로 연대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이리라. 혁명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혁명 없는 사랑은 공허하고, 사랑 없는 혁명은 맹목이다.
160p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 예술에 대한 우익의 공격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쳤다고 한다. 첫 단계는 예술 속에 묘사된 특정 부분의 좌경성(?) 지적하는 것이다. 덕분에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그려졌던 수많은 공공 벽화들이 수난을 겪어야 했다. 둘째 단계는 좌익 활동이나 단체에 연루된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정부 지원을 받는 공공 프로젝트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덕분에 수많은 전시회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공산당원인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 해서 전시회가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레드 헌트의 세 번째 국면이다. 이 반달리즘에 재미를 붙였던지 돈데로는 나아가 모더니즘 미술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은 ‘파괴’를 일삼는 위험한 반체제 미술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큐비즘은 디자인 된 무질서로 파괴하려 하며, 미래주의는 기계의 신화로 파괴하려 하며, 표현주의는 미개인과 정신병자를 흉내냄으로써 파괴하려 하며, 다다이즘은 조롱으로 파괴하려 하며, 추상은 뇌를 비워냄으로써 파괴하려 하며, 초현실주의는 이성의 부정으로 파괴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예술은 공산주의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왜곡되어 추하며, 아름다운 우리나라, 즐겁게 미소짓는 국민, 우리의 물질적 진보를 찬양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찬양하지 않는 예술은 불만족을 낳는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정부에 반대되며, 그것을 지원하는 이들은 우리의 적이다.” 여기서 그의 소박한(?) 예술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방식”으로 국가를 찬양하는 예술. 그런데 그의 예술관은 어딘지 익숙하다. 그를 인터뷰하던 미술평론가 에밀리 게나우어(1910~2002)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그것이야말로 바로 ‘공산주의 예술의 특성’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인민대중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체제를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그토록 적대하는 두 개의 전체주의 체제, 즉 공산주의와 파시즘 예술의 특성이 아닌가. 이지적에 돈데로는 노발대발 화를 냈다고 한다.
191p
마술을 믿습니까
오늘날 ‘네오’라는 접두사를 달고 중세주의가 부활한 것 역시 대중이 이 사회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이는 중세가 부활한 이유를 “현대의 헷갈리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건들을 간단하게 해명해주는 낭만적인 역사물에 대한 필요”에서 찾는다. 현대사회는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로 바꾸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졌고, 한 사람이 이성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여기서 이 사고와 행위의 무력감은 어떤 보충물을 요구한다. 그 허구적 보충물로 나타난 것이 중세적 환상과 서사라는 얘기다.
과거의 ‘중세주의’와 현재의 ‘신중세주의’의 성격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신중세주의가 과거의 중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신중세주의란 그저 과거의 중세주의가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다시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최근에 등장한 등장한 신중세주의가 실제로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정신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모던에 대립된다는 면에서 모던의 이전(premoder)과 이후(postmodern)가 상동성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95p
인문학의 미래
근대가 과학의 시대였다고는 하나, 사실 산업혁명 때까지도 과학은 실용성이 전혀 없었다. 산업혁명은 과학자가 아니라 기술자들의 발명품이었다. 여기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50년대, 과학혁명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경제는 과학의 도움 없이는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기 힘든 단계로 접어든다. 이때부터 이른바 ‘산학협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순수과학은 공학의 발전에 필요한 ‘기초학문’으로서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문제는 인문학이다. 이 애물단지를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기계공학에서 정보공학으로 이행하면서 인문학에는 뜻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사회 전체에 미디어의 망(net-work)을 깔아놓은 다음에 당장 떠오르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그 망을 통해 무엇을 흘릴 것인가?’ 이른바 ‘콘텐츠’가 중요해진 것이다. 그 콘테츠는 당연히 문,사,철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인문학에서도 산학협동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 인문학의 산학협동은 불행히도 ‘하청’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게임의 소재, 영화의 줄거리, 광고의 카피로 사용될 콘텐츠를 발굴해 납품하라는 식이다. 결과는 소재의 난개발. 시대정신(?)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들은 앞다투어 전통적 인문학의 분과를 폐하고 ‘콘텐츠 학과’라는 해괴한 것을 만들어냈다. 문,사,철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콘텐츠를 얻겠다는 얘길까? 아무튼 이 산학협동은 불행히도 인문학의 질적 저하만을 초래했다.
206p
영상맹의 시대
기술적 형상은 기술의 산물이다. 때문에 모든 기술적 형상은 바탕에 깔린 기술적 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요구한다. 상상의 산물로 여겨지는 그림과 달리, 사진은 사실의 기록으로 간주된다. 대중 조작의 매체로 사진이 선호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도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을 알아차리려면, 기계(카메라)와 기술(촬영술)을 읽어야 한다. 모호이 나지(1885~1946)의 말대로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이다”. ‘기술적 형상’ 중에는 우리가 찍는 사진과 달리 해당 분야의 전문적 식견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군사나 과학, 혹은 의학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기술적 형상이다. 아마 그 최초의 예 중 하나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항공사진이리라. 각 군의 지휘부는 처음에는 사진을 무시했으나, 곧 항공사진에 찍힌 병력의 이동 및 배치 상황에서 적의 전략을 읽어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진술이 지상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셈이다.
241p
박물관은 견고하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에 따르면 박물관은 예술의 묘지다. 원래 작품은 고유의 공간 속에 있었다. 하지만 박물관은 교회나 궁정 혹은 거실에 있던 작품을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내 한곳에 모아놓는다. 그렇게 박물관에 재화가 늘어날수록 감상은 외려 불가능해진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라 컬렉션이 너무 방대하여 질려버리지 않던가. 박물관에서 작품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잘해야 ‘교재’로서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반면 프루스트(1871~1922)네 따르면, 예술은 보는 이의 기억 속에서 비로소 작품이 된다. 아무리 내적으로 가치 있더라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걸린 작품은 기억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박물관은 작품과 주체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작품은 박물관에 걸려야 비로소 예술이 될 수 있다. 프루스트에게 박물관은 맥락애서 떨어져나와 생명을 잃은 작품을 묻는 예술의 묘지가 아니다.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처럼 예술은 그곳에서 삶을 얻는다.
247p
결국 문화적 저장과와 일상적 사물 사이의 경계선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 셈이다. 다만 그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몇몇 아이템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질 뿐이다. 박물관의 벽은 이렇게 견고하다. 제도는 어차피 보수적이다. 따라서 박물관은 예술의 무덤이 될 수밖에 없다. 박물관에 걸릴 정도의 작품이면, 이미 제 수명을 다하여 영예롭게 방부처리된 파라오의 시체다. 그 시체가 아무리 고귀해도 시체는 시체일 뿐이다.
한편, 우리는 예술을 작품으로 감상하는 문화 자체가 박물관으로 상징되는 예술적 제도에 의존한다. 고려의 청자는 생활에서 떨어져나와 박물관에 전시될 때 비로소 작품으로 감상된다. 이것이 근대적 예술문화다. 얼마나 모순적인 상황인가? 제도는 그 보수성 때문에 진정한 예술의 탄생을 방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작품을 미적으로 향수하는 것은 그 고리타분한 제도 덕분이다.
이제 아도르노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예술의 재화가 그 안에 비축되며, 그 재화들의 시장가치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앗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즐거움은 박물관의 존재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까? 간단하다. 박물관이 미적 문화의 전제가 되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탈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문제가 풀렸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오늘날 일탈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요즘은 박물관에서 외려 일탈을 요구한다. 일탈마자 제도화된 것이다. 이로써 박물관은 다시 무덤이 된다. 그런데 이 무덤은 일체의 부활을 허용하지 않을 것만 같다.
271p
평론가라는 기생충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 영화평론가란 대개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음악평론가란 작곡이나 연주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문학평론가란 작가의 굼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출발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평론가란 대개 애초 생산을 꿈꾸었으되 재능의 부족이나 의지의 박약, 혹은 지나치게 운이 없어 꿈을 접었으나, 아예 그 바닥을 떠나려니 너무나 서럽고 딱히 갈 데도 없어 ‘남의 생산에 평론이나 일삼으며 사는 사람이다.”-김규항-
김규항은 ‘취향’이라는 말을 미적 상대주의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취미에도 ‘좋은’취미와 ‘나쁜’취미가 있다. 모든 취향이 동등하다면, 공모전은 뭐 하러 하며, 미술관에 ‘이발소 그림’ 대신에 굳이 비싼 피카소의 그림을 걸어놓는가? 대중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취미에 기준이 없다면, <슈퍼스타k>도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다 역시 각자 나름의 취향을 갖고 있을 거다. 그들 역시 누가 뽑힐지 예상하고, 그 예측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좋은 취향과 나쁜취향의 구별이 없다면 아마 평론가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가 과감히 무시하는 평론에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이 있다. 첫째, 평론은 ‘작가-->작품-->관객’으로 이어지는 예술 소통의 체계 속에서 ‘피드백’ 역할을 한다. 평론가는 작가에게 수용자의 반응을 전함으로써(관객-->작가) 예술 소통의 과정을 ‘원환(圓環)’으로 완성한다. 둘째, 평론가는 미적 취향의 선진적 계층으로서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일반 대중에게 작가와 작품을 내개한다.
277p
저자, 비평가, 작가
<예술비평의 탄생>(1915)을 쓴 알베르트 드레스드너(1986~1934)에 따르면, 비평에는 크게 세 가지 요건이 있다. 첫째, 작품의 특성에 관한 기술을 담아야 하고, 둘째 작품의 미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포함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셋째 요건, 즉 비평문 자체도 문학적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한마디로 근대 이후에 평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적 장르로 존재해왔다. 고로 평론가가 “생산에 기생”한다는 말은 무식한 소리다. 평론가 역시 에세이를 생산한다.
283p
입법자로서 비평가
칸트는 예술가를 ‘천재’로 규정했다. 이는 ‘장인’이라는 고전주의의 예술가상과 확연히 구별된다. 장인은 오랜 학습을 통해 습득한 예술의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다. 천재는 다르다. 그는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제정하는 사람”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는 이렇게 타고난 재능에 따라 예술의 규칙을 제정하는 입법자다. 흔히 “타고난 예술가가 있듯이 타고난 비평가도 있다”고 한다.
2014.10.1까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