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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의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를 읽고 정리 발췌하면서...

by 까르멘 2015. 4. 11.



봄이오자 출간되는 여러책들중에

황경신의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를 읽고 

유독 눈에 들어오는 구절들을 책의 소제목과 페이지 넘버를 함께 적어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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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

15page


같은 생각과 같은 소리로 하나가 되는 일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으므로. 무언가를 조율한다는 것은, 의견이나 삶을 조율한다는 것은, 다른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고유한 음을 찾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므로. 피아노의 팽팽한 현을 잡아당겨, 도로 태어난 건반이 도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도인 당신과 미인 내가 한 음 높아지고 한 음 낮아져 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의 소리로 빛나고 나는 나의 소리로 당신의 세계를 밝혀, 멜로디는 화음이 되고 화음은 노래가 되고 노래는 시가 되어주기를, 이렇게 우리 하나의 세계에 담겨,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

18page


어쩌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떨림 그 자체가 아니라 떨림이 지나간 후의 여운일지도 모르겠다, 하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머물다가 떠나간 후 빈자리에 남아 이미 지나가버린 열정을 되돌아볼 때의 그 뒤늦은 떨림 혹은 떨림의 여운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뒤늦은 자각이 마음을 흔든다.

어떤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하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떨림의 여운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일지도 모르겠다. 떨림의 중심에 있을 때, 나에게 정말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모를 때,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알 수 없을 때는 그 짧은 순간을 느끼는 것만으로 이미 벅차다고.


춤을 추듯이

24page


왈츠의 리듬처럼, 오른발, 왼발, 다시 오른발을, 왼발, 오른방, 다시 왼발을, 조금 절뚝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아마 괜찮을 거라고, 그건 처음이라는 증거라고, 모든 처음은 그런 걸 거라고, 이르는 것이 나 자신인지 그 사람인지 모르게 될 때까지.


49page


그때 나는 당신의 강함과 약함, 웅변과 침묵, 거침과 부드러움, 그리고 그 사이를 무수하게 오가던 변덕 같은 것들의 흐름에 저항 없이 실려 갈 수 있을 만큼 튼튼했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 그때 당신은 나의 완고함과 흔들림, 넘침과 부족함, 진실과 거짓, 그리고 그 사이를 무수하게 오가던 망설임 같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영민했다.

 

소리를 알아주는 것

57page


백아는 그를 지음이라 불렀다. 알 지(知), 소리 음(音). 백아에게 있어 거문고 소리는 곧 자신의 마음이었으니,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그러니까 마음의 친구는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아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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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지기와 의형제를 맺은 백아는, 일 년 후의 약속으로 작별의 말을 대신한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생에 작별을 고한 종지기의 무덤 앞에서, 백아는 천근만근 무거운 거문고를 무겁게 뜯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자, 백아는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현을 뜯어내고 오동나무와 밤나무로 지은 울림통을 산산조각 냈다.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가 거문고의 현을 끊은 그날 이후, 누구도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가령

71page


'가(假)'의 집은 언덕 위에 있어 사시사철 바람이 분다.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가팔라서 발판을 내고 난간을 만들어두었다. 좀처럼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는 '가'를 두고 소문이 무성하다. 바싹 마르고 허리가 굽은 조그마한 노인이라더라, 얼굴이 어찌나 추한지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다더라, 왼쪽 눈동자와 오른쪽 눈동자의 색깔이 다르다더라, 아니다,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라더라, 미소를 지을 때 왼쪽 뺨에 보조개가 생긴다더라, 콘트라베이스처럼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사람을 홀린다더라, 같은 이야기가 끝도 없었다.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가'가 아름답고 너그러운 거대한 거인이라는 것이다. 길을 잃은 나그네나 배가 고픈 아이가 가파른 길을 따라 힘겹게 올라가면, '가'는 기꺼이 그들을 맞이하여 환대를 베푼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그 집을 찾아갈 만큼 용감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하늘색 부리로

184page


나에게 중요한 것이 자신에게도 중요한지, 내가 원하는 것을 자신도 원하는지, 어쩌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에게도 행복한 일이 될지. 한 번쯤 생각해볼지도 몰라. 만약 나와 함께 길을 떠난다면 어떨까, 하고. 친구가 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거라고, 하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만큼이나 멋진 일이라고, 하늘색 부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멎다

216page


귀를 기울이면, 당신이 걸어가는 길이 들린다. 늦은 가을이고, 대기는 중력을 벗어난 듯 높고 투명하다. 햇볕을 듬뿍 받고 잘 마른 빨래처럼 당신의 마음은 보송보송하다. 이런 방식의 강인함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젊은 시절에 당신은 무겁고 싶었다. 무의미한 빈칸들을 의미로 채우기 위해 한밤에도 또렷한 의식으로 무장하고 마음의 날을 벼렸다. 말랑한 것들, 흔들리는 것들, 녹아내리는 것들을 당신은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의 세계는 반듯하고 단단하고 반석처럼 굳건해야 했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당신은 일직선으로 그어진 길을 걸었다.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으로, 휘날림 없는 옷자락에 싸여, 이르는 곳마다 선명한 흔적을 남기면서.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무엇을 만났다. 누군가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어떻게, 일 수도 있고 어딘가, 일 수도 있고 왜, 일 수도 있다. 그날부터 당신의 마음은 금이 가고 당신의 날들은 휘영청, 기울어졌다. 길들이 뒤섞이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꾸만 당신을 나부끼게 했다. 앞만 보고 걸어가던 당신이 멎은 건 그때였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문득 세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이면, 당신이 걸어가는 길의 붉고 푸른 나뭇잎들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자주 걸음을 멈추고 햇볕과 바람에 마음을 말린다. 강인하다는 것은 가벼울 대로 가벼워져서 투명해지는 것, 중력을 벗어나 날아오르는 것이라는 것을 배울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상기한다. 의미로 가득 찬 칸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당신은 아득한 행복에 빠진다. 그 한순간에, 세계가 멎는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당신의 심장에, 영원으로 기록된다. 


닦다

238page


그래도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다. 잘 마른 천으로 충고를 닦고, 조각난 사포로 비난을 닦는다. 그의 손끝에서 세계는 몸을 비틀고, 형태와 색채를 끝없이 바꾼다. 완성되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며, 영원히 고정되지 않기 위해.


흐르다

264page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보고 들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렸다. 섬세한 감각으로 숨겨진 것을 찾아내고, 예민한 촉각으로 길을 열었다. 누구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들을 열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또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멀어지는 것들과 변해가는 것들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았고, 떠나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지 않았다. 어이없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버렸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과장하지 않았다. 


흐리다

269page


그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보고 들은 것을 신중하게 저장하고 적절하게 사용했다.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알았고 무엇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할 지 알았다. 누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았다. 생일과 기념일 들, 무심하게 버려진 추억에서 길어올린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또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기억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무심한 이들을 탓하지 않았다. 우스꽝스럽고 멍청한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지만 성실하게 후회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