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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의 <슬프지만 안녕>을 읽고 인상깊은 구절들을 발췌하면서

by 까르멘 2015. 10. 19.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황경신의 <슬프지만 안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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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page

기쁜 우리 젊은 날


 어쩌다 보니 심심할 때, 우울할 때, 리포트를 쓰다가 졸릴 때, 즉석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배는 고픈데 혼자 밥 먹기는 싫을 때, 괜히 놀러가고 싶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만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 사이에 그는 다섯 번쯤 실연을 당했고, 그녀는 두 번쯤 심각한 연애를 했다. 그리고 일곱 번쯤 진탕 술을 마시면서, 차라리 너랑 연애할까, 하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좋아하는 영화, 책, 취미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열여덟 살 때까지의 이야기였다. 같이 어울려 다니려다 보니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맞춰주고 양보하는 것을 어쩔 수없이 배워야했고, 그러다 보니 원래 자신의 취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순정만화를 읽게 되었고, 그녀는 야구경기에 열광하게 되었다.


136page

장밋빛 인생


 "여기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길도 아니고, 망각의 술이라고는 해도 전부 잊어버리진 못하죠. 하지만 가까운 과거의 일 정도는 잊게 됩니다. 아마도...이곳에 오게 된 이유 같은거."


 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폴의 밴드가 연주를 마쳤고, 마리는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테이블 위에는 술병들, 컵들, 접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속삭임 소리,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리고 <라비앙 로즈>가 흐르기 시작했어요.


 "다들 믿고 싶은 겁니다. 세상 어딘가에 장밋빛 인생이 있다는 걸 말이죠."


 이상하게도, 남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울고 있었어요. 우리 사이에는 세 송이의 자줏빛 장미가 놓여 있었고, 그 중 가장 아름답게 활짝 피어난 꽃은 막 한 장의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선배, 선배는 알고 있었나요? 인생이란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후환들과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아름다움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러나 어떤 노래는, 그토록 단단한 시간의 벽에 균열을 만들어 우리를 다시 한 번 불안하고 서러운 그 시절로 몰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176page

인터뷰


내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정말로 혼란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가 만들어낸 혼란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는 약간 주저하면서, 그러나 조금도 더듬거리지 않고, 주어진 시나리오로 연기하는 배우처럼,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느끼는 것, 또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그의 인생까지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느끼는 것, 매력적이고 똑똑한 여자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지만, 그런 걸로 사랑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 모르진 않죠?"


 이런, 맙소사,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화는 나지 않았다.

 

220page

세계의 끝과 마지막 킬러


내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건 세계의 끝이다. 기껏해야 한 계절도 견디지 못할 사랑이나 추억 따위는 이제 신물이 난다. 만남과 이별이 되풀이될수록 내 영혼은 절대적인 것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 갈망은 '세계의 끝'에 대한 믿음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곳에 이르면,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서받은 후 영원히 평화로운 잠 속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달콤하지도 않고 씁쓸하지도 않은, 격렬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은,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모든 감정이 무(無)로 돌아가는, 잠.


 "세계가 끝날 때의 풍경이란 이런 거라고, 줄곧 생각해왔어요."


243page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자크 프레베르(1900~1977)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

뭔가 단순한 것

뭔가 쓸 만한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그림을 걸어 놓을 것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맘먹고 오는 것이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하는 법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무관한 법

 

새가 날아올 때는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리고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모든 창살을 하나씩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새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서늘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와 여름 열기 속

풀숲을 기어다니는 작은 곤충 소리들을

또한 그릴 것

 

이어서

새가 노래하기를 맘먹도록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해도 좋다는 징조

 

그런 후에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

그림 한 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