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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고 인상깊은 구절을 발췌하면서

by 까르멘 2015. 11. 9.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이석원의 산문집<언제 들어도 좋은 말>입니다.

소설인지 에세이 인지 일기인지 알 수 없는 구성의 이 책, 

어떤 결말로 달려가는지 

보는 내내 가슴졸이다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 어떤 말인지는 

책의 제일 마지막에가서야

임팩트 있게 제시되는... 

책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언니네 이발관>의 팬으로서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그런 점이야 다 커버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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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page

서로 절대로 연락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하던 그녀가 정작 자신은 지난 몇 달간 자신의 친구에게 나에 관한 수많은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내게 무척 놀라운 일이었는데 일기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한 그것들은 실로 모두 나에게 보내는 말들이기 때문이었다.

'허선생. 나 그사람 보고 싶어.
우리 잘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물음들은 너무도 여러 번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또 놀라웠던 것.

'그사람 공연이라 말 못해ㅋ 특이하지?
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노래를 할까.'

그녀는 아마도 나와 만나던 중간에 어떤 연유에선지 나에 대해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가 <보통의 존재>라는 책을 쓴 것도 진즉 알고 있어서, 상실과 관계의 종말에 대해 피력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독 크게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내가 생각날 때마다 내가 아닌 인조가슴여인에게 문자를 보냈던 모양이다. 그중에는 심지어 나와 있는 동안에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인조가슴여인에게 보낸 것들도 많아서,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나랑 있으면서 누구와 그렇게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328page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원하는 것이 명확한데 단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소원인데 아무리 찾아도 그런 일이 없다. 그럼 답은 그냥 살면 되는데 그러질 못하겠다. 자기 책에선 없으면 그냥 살라고, 무슨 관객이 되면 그뿐이라고 참으로 무심하게도 말했으면서. 정작 너의 머릿속에선 같은 질문과 대답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루 온종일, 아니 벌서 이년이 넘게 맴돌고 있다. 그래도 찾고 싶었으니까.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었으니까.


334page


난 전기를 좋아한다.


정말로 솔직한 전기는 대상의 특별함과 위대함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곤 했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서툴고, 성공과 돈에 집착하고, 인물의 이기적이고 야비한 모습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런 전기들은 세상에 나만 바보천치거나 속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에릭 클랩턴처럼 위대한 뮤지션도 이렇게 약해 빠진 인간이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이런 식으로, 자신이 저지른 미숙함이나 실수 같은 것들에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질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관대함을 갖게 해주었던 것이다.


자책하지 않게 되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책 한 권 읽음으로써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남는 장사도 없을 것이다.


 336page


세상에......나이 구십이 넘어서도 늘 글을 쓰는 사람의 하루는 어떤 것일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단하고 부러운 남의 인생을 그저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래, 글은 이런 사람이 써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제 그 일에서 비켜서게 된 사람이니 이렇게 부러워나 하는 거지 뭐, 라고 체념하면서. 그런데 그날 난 이 묘한 일들, 내가 신경질을 부려 기분이 상했을 분이 오히려 내게 책을 보내오고, 그 책을 쓴 작가의 프로필이 또 내게 알 수 없는 감흥을 준 이 작은 에피소드를 어쩐지 기록해두고 싶어 일기장을 열었다가 미처 생각 못하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장편소설을 쓴 뒤 근 일년을 글이라곤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길든 짧든 나는 뭔가를 거의 매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일기장에, 노트에, 하다못해 블로그에.


342page

작은 갈등 덕에 선물로 받은 로제 그르니에의 책은 뜻밖에도 내 오랜 고민을 풀어주는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문제는 글 자체가 아니라 글의 성격이었다. 여태껏 그래 온 것처럼 난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열매가 더 많다는 '필요'에 의해서 소설, 그것도 장편을 택했고, 결과는 보시다시피였다. 장편소설에 관한 어떤 경험이나 흥미도 없던 내가 하면 할 수 있다는 만용으로 버틴 4년의 세월에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제 더는 내 몸이, 내 마음이, 내 나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난 읽거나 쓰지 못하게 된 게 아니라 단지 원치 않는 글쓰기에 지쳐 있었다는 사실을, 저 바다 건너 프랑스의 노작가가 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수수한 단편 하나가 일깨워 준 것이다. 이토록 나른하고 짧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바로 내가 원하던 것으로.


346page

나는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려는 게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꿈이나 목표, 하고 싶은 일 같은 것 없이도 지난 사십년간을 충분히 잘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건 찾고 싶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요, 찾아진다 해도 언젠간 시들해질 수 있으며, 또다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여전히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거나, 누구나 잘하는 일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을 뿐. 그때는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