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문유석 부장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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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27page
새삼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사회 곳곳에서 일하는 다양한 한 명 한 명의 개인들이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로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토론하며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차피 정답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사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혜안 있는 영웅적 정치인이 홀연히 백마 타고 나타나서 악인들을 때려잡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114page
결국 취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박탈감과 불안감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난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며 자신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구분짓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수능 점수를 거의 유일한 공정 경쟁의 결과로 받아들여 수능 배치표 피라미드에 따른 '학력의 위계화된 질서'에 심각하게 집착한다. '인서울'과 '지방대'에 대한 취업시 차별은 당연한 것이고 지방대도 자기보다 하위권 지방대에 대해 마찬가지 태도를 취한다. 그 배후에는 '타인의 상승'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대학 서열에 따라 인간의 능력, 태도 자체에 우열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선택한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 문제를 언급하면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로 간주한다. 사회는 어쩔 수 없으니 개인이 변해야 한다는 자기계발 논리의 폐해다.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132page
요즘 인터넷 일각에서 흔히 보는 '팩트는 팩트다'라거나 '개취(개인 취향)존중' 운운의 논리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하느냐'는 한마디다. 요즘 인터넷에는 '선비질'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문학의 힘
154page
인간 행위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문학 이외에 육하원칙이 지배하는 신문기사가 있다. 두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은 결국 인간 내면의 작용인데, 기자들은 주로 외형적 행위와 그 결과에만 치중하고 내면의 동기는 돈, 욕정, 복수심 등으로 간명하게 유형화하곤 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사건을 쉽게 이해하길 원하고,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누구에게 분노하면 되는지 결론부터 알려주기를 성마르게 재촉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분노는 즉각적이고 선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 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신문기사보다 주관적인 내면고백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 줄 때가 많다. 작가는 최소한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심층적인 내면세계를 관찰해서 쓰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작가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옴진리교 사린가스 살포 사건에 관한 르포 '언더그라운드'를 쓰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인 옴진리교 신자들도 인터뷰했다. 예상 밖으로 신자 중에 명문대 출신의 연구원 등 이공계 출신이 많았다. 소설가여서일지는 모르지만 하루키는 '픽션'을 읽어본 경험의 부재가 엘리트 과학도를 광신도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검증된 법칙과 데이터의 세계에서만 살던 이가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 교주)처럼 통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 예외적 인간의 극단적인 상상력과 조우했을 때 오히려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 있는 인간은 비상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162page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를 도출하는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과격한 목소리들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반대의견을 가진 집단의 반발과 결속만 강하게 만들어 의견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한 진영 내부에 생기는 작은 균열에서 변화의 지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같은 진영 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작고 부드러운 '다른'목소리들이다. 작은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선거와 같은 큰 세력 다툼의 시기를 전후하여 집단 내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 (코끼리를)슬쩍 다른 길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만 고집하지 않고 당장 개선가능한 작은 방법들을 바로 적용했고, 작지만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켰다. 영웅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장그래에게 기회를!
165page
장그래를 막는 학벌의 벽은 왜 존재할까. 먼저 학력이 인재를 평가하는 안전한 방식이라고 여겨져서다. 개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입시경쟁의 승자라는 징표가 우수한 두뇌, 성실성, 인내심을 증명한다고 보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대체로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최고 스펙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온 자로서 고백하건데, 스펙은 '탁월함'까지 증명하지 못한다. 수많은 법조인이 일하는 걸 봤고, 파산부에서 대기업 임직원들을 관리했고, 조정위원들을 직접 선발했다. 내가 본 최고로 감동적인 재판을 하는 판사, 가장 수완 좋고 유능한 파산 관재인과 임원, 최고의 분쟁해결 능력을 보인 조정위원은 모두 소위 '스카이' 출신이 아니었다. 실제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다양했고, 그 능력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당연한 거다. 대학 입시용 평가 시스템은 대학 공부를 할 만한 일반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니 연구직, 대학교수 및 이에 유사한 직업은 몰라도 사회의 다양한 일을 잘해낼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만능 도구가 아니다.
*정답 없는 세상
202page
198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정답이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선의를 가지고 헌신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선악과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옳은 가시밭길을 선택하느냐 비겁한 안락함을 선택하느냐의 윤리적 결단만이 주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쉽게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아예 생각하지 않거나 양극단에 서서 자기만 옳다는 독선에 빠져있게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절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먼 나라에는 지상낙원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믿는 이들도 있지만 현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모든 사회는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고 나름의 특수성이 있다. 그대로 가져다가 베끼면 되는 정답 같은 건 없다.
이런 시대일수록 집단의 논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건 위험하다. 어느 집단도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남의 판단으로 자기 판단을 대체하지 말고 각 개인이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실사구시 정신이 필요하다. 막연한 믿음보다 실증적 근거를 들어 토론하고 최선이 안되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재판을 해보아도 다투는 양측 모두가 진실의 일부분씩을 자신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조각 그림을 맞춰야 비로소 진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승리란 존재하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상대를 몰살시키는 전쟁이 아닌 이상 중간에서 타협하는 게 현실적이다. 당파적 진영 논리는 이런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생략하려는 게으름이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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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세상은 마치 해방 직후로 타임슬립한 듯하다. 좌빨, 종북, 수꼴, 극우, 보수, 진보. 그런데 이 구별에 관한 공인 기준은 없는 듯하다. 발언 몇 가지만으로 양쪽에서 병아리 감별하듯 용감무쌍한 단정을 내린다. 조금 과장하면 이런 식이다. 어느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면 수꼴, 글 서두에 햇볕정책을 옹호하면 종북, 그런데 그 근거로 1970~1980년대 경제성장으로 인한 대북 우위 학고화를 들면 극우, 경제성장 이면의 빈부격차와 인권침해를 지적하면 좌빨, 그런데 그가 대치동에 살고 있으면 강남좌파, 알고보니 쪽방 사글세면? 글쎄다. 아마도 간명하게 원적지 기준설을 취하지 않을까. 호남인지 영남인지.
구체적으로 무슨 이념과 무슨 이념이 대립한다는 것일까? 정말 우리나라에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이 스페인내전 때처럼 대립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 양대 정당이 이념정당인가? 두 정당의 공약집을 표지 가리고 읽어서 구분하기란 펩시 챌린지 이상의 도전이다. 한쪽의 인기 공약을 곧바로 다른 쪽이 따라하는 일도 흔하다. 이념정당은 고사하고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정도의 차이도 찾기 어렵다.
보수, 진보란 보통 정보의 역할, 복지정책, 조세정책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구별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사회에서 가장 열렬히 대립하는 사항은 실은 이념, 정책이 아니라 어느 대통령을 '사모'하느냐와 애향심 아닐까. 여기에 세대문제가 결합된다. 조용필 세대와 서태지 세대가 서로 '울 오빠'의 업적이 더 뛰어나다고 싸우는 꼴이다. 자기 세대의 우상이란 결국 자신의 청춘 시절에 대한 자기애다. 객관적이기 어렵다. '울 오빠'를 모욕하는 안티들에 대한 분노,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영웅에 대한 연민, 이런 정서의 문제가 결부되기 때문에 갈등은 더 불타오른다.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더 집착한다. 하지만 정작 현재 청춘들은 과거 우상에 대한 '리스펙트'따위엔 관심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진학, 취업, 결혼...... 장장 자기 앞가림하는 것만도 전쟁인 미생의 청춘들에게 기성세대의 이념 논쟁, 역사 논쟁은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다.
*필라델피아 한낮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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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의 문제는 참으로 복잡하여 일도양단에 흑백을 가릴 수 없는 면이 많다. 인터넷을 서핑하다보면, 우리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다들 참 명쾌한 정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진보, 보수, 좌파, 우파. 결국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 목소리는 오히려 귀한 것 같다.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고 이야기하면, "간단히 말해서 누구 잘못이란 말이냐! 너 이런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저쪽이지!"라고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당장 튀어나온다.
*무지라는 이름의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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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1965년 대량학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
이 영화는 오랜 시간 힘들여 구축한 인류 문명이라는 구속복을 벗겨놓으면 인간이라는 영장류 동물이 얼마나 쉽게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돌변하는지, 즉각적인 욕구충족만을 추구하는 약육강식의 짐승이 되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생생한 교육자료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학살의 역사는 바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바 있고, 또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일들이다.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안와르 콩고를 비롯한 학살자들은 사악한 싸이코패스라기보다 그냥 무지한 자들이다. 보다보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순진무구함(?)에 인간적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물론 영화를 보고 이들을 동정하는 건 어리석다. 악을 행하는 악마보다 선악 구분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야수가 더 무섭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야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야수를 문명의 굴레에서 풀어준 것은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다.
*문명과 폭력
238page
핑커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폭력을 감소시킨 결정적인 힘은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 즉 근대국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개인들은 국가를 만드는 사회계약을 체결했고, 국가가 폭력수단을 독점함으로써 무정부 상태의 폭력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게 된다. 상업의 발전 역시 중요한 요소다. 더 많은 교역 상대와 물건을 교화하게 되면 상대가 죽었을 때보다 살았을 때 내게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근대 이후 폭력적인 남성 문화에서 탈피하는 여성화,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세계주의의 흐름도 평화를 촉진시켰다. 이는 결국 자유주의적 인도주의를 향해 가치체계를 진화시켜온 이성의 힘이다. 이를 모두 종합하면 인류 역사가 밟아온 '문명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나는 아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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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은 합리적 추론보다 도덕적 직관에 의존하는데, 미국 진보세력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발달시킨 도덕성 중 자유와 배려에만 치중하고 정당한 권위, 고결함, 소속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무시해 지지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상대의 도덕감정을 모욕하는 것보다 상대도 공감할 만한 부분을 넓혀가는 것이 현명하다. <샤를리 에브도>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68혁명의 후예다. 그들은 저항의 목적인 휴머니즘보다 저항 그 자체를 더 신성시하는 근본주의에 빠진 것은 아닐까.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
266page
미국사회에는 지위가 높든 낮든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영웅으로 존중해 주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아이돌이 아니라 소방관이 아이들로부터 환호를 받는다. 꼭 직책에 따른 책임만이 아니다. 위기 상황하에서 평범한 시민들도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판단되면 슈퍼 히어로처럼 과감히 떨쳐 일어난다. 평범한 승객이 총을 든 비행기 납치 테러범에게 덤벼드는 것은 유불리를 계산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는 가치관의 문제일 것이다. 과연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보통은 '사회지도층, 어른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거나 '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등등의 답이 나올 듯 하다. 내 의견은 '작은 책임부터 부담 없이 맡을 수 있어야 한다'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한 집단주의 문화의 사회다. 나서는 걸 죄악시하고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가 뭘 잘했을 때의 칭찬보다 그가 뭐 한 가지 잘못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달려들어 돌팔매질하는 광기가 훨신 뜨겁다. 당연히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면 책임을 맡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는 존재다. 어릴 때부터 잘하든 못하든 뭔가를 책임지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하고 못한 부분은 감싸주고 격려하는 문화가 기꺼이 책임지는 어른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무엇을 시도하고 실질적인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보다 남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창작자보다 평론가가 많다고나 할까. 사실 비평할 논리야 얼마나 많은가. 미봉책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해결이라고 볼 수 없다, 구조적인 문제인데 현상만 일부 건드리는 것이 무슨 의마가 있느냐, 나름 노력은 한 것 같지만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력이라도 해보려는 남을 냉소함으로써 그것도 하지 않는 비루한 자신을 위안한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다 쇼일 뿐이라며.
팔짱 낀 채 '한계''본질''구조적인 문제' 운운 거창한 얘기만 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어떤 통속적인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아래 대사를 듣고 그 통찰력의 깊이에 놀란 적이 있다.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Anyone can be cynical.)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Dare to be optim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