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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나의 남자>를 읽고. 인상 깊은 구절들을 발췌하면서.

by 까르멘 2016. 3. 6.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임경선의 장편소설<나의 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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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page


이것은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갈증과 번민, 인생에 비춘 작고 소중한 빛에 대한 이야기다.


스스로가 무서워질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머리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몸이 일으키는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일은, 인간의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리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70page


새삼스럽게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가 왜 성현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뚜렷한 이유 따위 없어도 되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곰곰 생각해보면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발이 땅에 닿아 있는, 살아 있는 실질적인 노동을 하는 성현이 좋았다. 그의 진지한 노동의 태도를 보노라면 뭐랄까 그가 하는 일상의 노동은 정직하고 옳아 보였다. 특히나 가만히 앉아서 머릿속만 분주하고 산만한 나의 노동에 비해서 말이다.


자기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성현이 좋았다. 고요하고 견고하게 취향과 품위를 간직한 성현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천천히 살아가는, 그리고 제법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성현이 좋았다. 세상 다른 남자들의 허세 가득한 몸짓이 눈에 보이면 보일수록,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드러낼 필요가 없는 자기충족적인 성현이 좋았다. 그는 번잡스럽고 혼잡한 세상 속에서 과묵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210page


"이제 저도 집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의 눈빛은 구슬픈 애원에 가까웠다. 옅은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머릿속이 멍해져 고개를 한참 숙인 채 계속 그가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가 음악소리를 줄이며 입을 열었다.


"혼자 잘 지낼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이젠 이 상태가 편안합니다."


두 사람 다 어린애가 아니었기에 그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 문장으로 표현했을 뿐이지만, 가슴 아프도록 그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적어도 정직하고 진지하게 나를 직면하고 있었다.


"글을 쓰셔서 더 잘 아시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늘 바뀝니다. 이젠 힘든게 솔직히 싫습니다."


그의 눈빛은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그것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늘 바뀌고 언젠가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거에요.'


혼자 마음속으로 아무리 속삭여보아도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