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무라카미 하루키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연작 에세이 모음집=<무라카미 라디오>1,2,3권 중 일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무라카미라디오1권=저녁무렵에 면도하기
무라카미라디오2권=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무라카미라디오3권=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중 2권에서 총 2편발췌했습니다.
100페이지
이제 그만둬버릴까
‘메무아르’는 일반적으로 ‘회고록’‘자서전’으로 번역되지만, 아무래도 말이 너무 딱딱하고 묵직해서 잘 와닿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듣고 보고 생각한 것을 책으로 정리했습니다’쯤 되겠다. 해외 서점에는 대개 ‘전기’코너가 있고 거기에 메무아르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 서점에는 일단 그런 부문이 없다. 어째서일까.
교토의 한 헌책방에서 조지 마틴의 회고록<귀야말로 모든 것 All You Need Is Ears>를 발견하고,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푹 빠져 읽다가 덕분에 휴대전화를 자리에 두고 내려버렸다. 마틴 씨는 비틀스의 프로듀서이자 전설적인 존재로, 책 제목은 물론 히트곡 ‘All You Nees Is Love’의 패러디다.
이런 유의 책은 하나같이 비슷하다고 할까, 페이지를 펼치기 전부터 가장 스릴 있는 부분이 대충 예상이 된다. 리버풀에서 온 네 명의 이름없는 로큰롤 가수가 우연한 기회에 세계적 영웅으로 부상하기까지의 숨넘어가도록 흥미진진한 몇 년 동안(혹은 몇 개월 동안)을 그린 대목이다. 밑바닥에 있을 때나 정점에 선 뒤의 얘기는 말하자면 그 전후의 부록 같은 것이다.
비틀스 팬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나는 몰랐으나), 무명시절 네명은 데모녹음을 갖고 레코드사를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이제 음악 따위 그만둬버릴까’하고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지역 클럽에서는 제법 먹혔지만 레코드사의 높은 사람들은 그 음악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그들에게 그런 음악은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형 음반사 EMI 산하의 파로폰이라는 소규모 레이블을 맡고 있던 조지 마틴은 비틀스의 음악을 듣고 ‘좀 거칠긴 하지만 묘하게 마음을 끄는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보다는 코미디 음반을 만드는 것이 그의 주요 업무였지만, 주위의 야유 속에서도 자신의 직감을 믿고 용기내어 네 청년과 계약을 했다. 만약 마틴 씨가 머뭇거리고 주저했더라면, 어쩌면 존도 폴도 그대로 음악에 마침표를 찍고 뭔가 건실한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체국 직원이라든가.
인생, 앞날은 알 수가 없다.
나는 서른 살 때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고 작가로 데뷔했다. 출판사에 인사하러 갔더니 편집장인 듯한 사람이 “당신 작품은 상당히 문제가 있지만 뭐(‘적당히’라는 뉘앙스로) 한번 해보세요”하고 상당히 쌀쌀맞게 말했다. 그떄는 ‘그렇구나, 나한테 문제가 있구나’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돌아왔다.
비틀스와 비교하는 것은 쑥스럽지만, 회사란 ‘문제가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남달리 개성이 강한 것, 전례가 없는 것, 발상이 다른 것, 그런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배제한다. 그런 흐름 속에서 ‘동요하지 않고 꿋꿋할’ 사원이 얼마나 있는가로 회사의 기량 같은 것이 정해지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한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일본 경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204페이지
까마귀에게 도전하는 새끼고양이
센다가야의 뒷골목을 산책하다가 까마귀에게 시비를 거는 새끼고양이를 발견했다.
커다란 까마귀 몇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고, 조그맣고 하얀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그걸 향해 덤벼들었다. 물론 까마귀 쪽이 덩치도 큰 데다 힘도 세고 수도 많다. 부리도 날카롭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싸운다면 새끼고양이는 승산이 없다. 전혀 없다. 그러나 고양이는 진지하게 으르릉 거리며 과감하게 가지를 타고 올라갔다. 어쨰서 그러는지 사정은 모르겠다. 뭔가 대단히 맺힌 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까마귀 쪽에서는 시비를 받아줄 생각이 없는지 고양이가 다가오면 “까악”하고 놀리듯 한 번 울고 가까운 다른 가지로 사뿐히 이동할 뿐이다. 고양이는지지 않고 다른 까마귀에게 도전하지만, 그 까마귀 역시 “까악” 울고 다른 가지로 옮겨간다. 적당히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역력했다.
나는 그때 한가해서(대체로 한가하지만) 잠시 그곳에서 결말을 지켜보기로 했다. 때때로 “어이, 힘내”하고 새끼고양이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완전히 야윈 개구리를 응원한 고바야시잇사같다.
상대가 어린 아이고, 내가 옛날 검객이었다면 “너 아주 자질이 보이는구나, 무사수행에 데리고 가줄 테니 나를 따르라”라고 말할 법한 장면이지만, 나는 검객이 아니요 상대는 그냥 고양이니 그럴 수도 없다.
어찌 됐던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쫓아가고, 까마귀는 상대를 약올린 뒤 날개를 펼쳐 휙 도망가는 구도가 끝없이 되풀이되다보니 좀 지겨워져서 그 자리를 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치지나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여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무모한 새끼고양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의 나와 비슷하다. “상대를 잘못 만났어. 게임이 안돼”하고 누가 말려도 나는 넘어야 할 벽이 있으면 꼭 기세 좋게 시비조로 덤벼들었다. 자랑이 아니라(그런 짓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이제 와서 반성하는 일도 많다) 그것은 단순히 내 천성이었다. 타고난 성격. 바꿀 수가 없다. 보기와 달리(랄까) 흥분을 잘한다.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아픈 경험이 많았다.
내게 까마귀 떼란 한마디로 ‘시스템’이었다. 여러 가지 권위를 중심에 둔 틀. 사회적인 틀, 문학적인 틀, 당시 그것은 우뚝 솟아오른 돌벽처럼 보였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탄탄한 존재로 그것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돌이 무너지고 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환영할 상황인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시스템이 탄탄했을 때가 싸움이 쉬웠다. 즉, 까마귀가 제대로 높은 가지에 앉아 있을 때가 구도를 읽기 쉬웠다. 지금은 무엇이 도전해야 할 상대인지 무엇에 화를 내야 좋은지 도통 파악하기 힘들다. 뭐, 눈을 부릅뜨고 보는 수밖에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