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마음보고서
-하지현-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정신과 의사 하지현의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입니다.
마음의 패션:마음도 유행 따라 옷을 바꿔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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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에너지의 방전 현상, 절전모드가 우울증이다. 그러나 우울함이 우리 삶에 나쁜 영향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은 굉장히 정확한 현실적 객관성을 선물해준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긍정적 착각을 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를 ‘긍정적 착각’이라고 한다. 왜곡된 행복감이다. 정상적 조건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실제보다 낙관적으로 앞날을 본다. 실제로 성공까지 하면 착각이 심화될 위험도 있다. 성공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 우울한 상황이라고 느끼고 있을 때가 사실은 자신의 실제 객관적 현실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우울해본 사람이라면 현실을 볼 줄 알게 된다. 바닥을 쳤다가 올라와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우울해본 사람은 그 경험 때문에 공감능력이 좋아진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된다. 오직 잘나기만 한 사람, 성공만 해본 사람은 자기만 알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헤아릴 이유가 없다. 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위축되고, 우울하고, 자책하고, 힘들어하고 후회해본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 신경을 쓴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같이 느껴봐야 한다고 여긴다. 우울증상이 있는 동안은 감정적 공감이 증가해 타인과 정서적 동일시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강렬한 경험은 우울기가 끝나도 남아서 영속적인 정서적 자산이 된다. 즉, 일종의 정신적 습관이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 상호 의존의 그물망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현실에서 더 큰 상호 의존을 통한 안전감을 만들고 키워나가려는 동기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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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인이 되어서는 상사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에 익숙해진 채, 오직 그것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들이 이제 지쳤다. 더 해낼 것을 원하기만 하는 뱀파이어 같은 사회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아의 일부가 아닌 자아의 내부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통해 나만의 보상을 얻고, 남과 비교하기보다 이전의 나와 비교하면서 보상을 얻는 ‘자가발전’식 자주적 라이프 스타일을 만드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캠핑하고 오토바이 타는 아저씨들은 그렇게 변화해가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다.
마음의 진자 운동:왜 난 결정하기가 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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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놀이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지만 함께 비슷한 놀이를 하는 것 자체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발달단계의 놀이다. 까페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혼자의 시간을 보내되, 자기 집에서 그러기보다 여러 익명의 사람들과 상호작용 없이 하는 것, 바로 이것이 현대인의 평행놀이다. 어릴 때 한번 경험해본 것이기에 익숙하고, 또 그 안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안온함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놀이적 즐거움 덕분에 도시 곳곳에 있는 까페는 지금도 성업중이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만 있기에는 왠지 결핍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마음을 달래주는 덕분이다.
마음의 싱크홀:도처에서 생겨나는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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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남성 지식인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여기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신 정도면 꽤 여성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실제 저울은 한참 남성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를 하기 일쑤다. 과거 내가 다양한 소수자 이슈에 대해서 매번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곤 하던 때, 친한 선배가 이런 충고를 해준 적이 있다. “잘 모르겠고 애매할 때는 소수자 편을 드는 것이 여러모로 맞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고민한다고 해도 이미 그건 선입견이 포함된 이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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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소통의 문제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이만큼 표현하면 상대가 그에 맞춰 대응하는 것이 소통의 균형이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는 것이 커진다고 상대의 반응도 이에 상응하지 않는 게 문제다. 이럴 때 상대 처지를 먼저 생각하고 내 요구 수준이 과하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참을성이 적으면 그럴 여유가 없다. 기대만큼의 반응이 없으면 내 목소리와 감정의 수위를 높인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려면 더 크게 두드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말로 하기보다 칼로 찌르고 총을 쏘며 분신을 한다. 이 정도는 해야 내 마음이 단번에 확실히 전달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덕분에 갈수록 작은 일에 욱해서 서로를 다치게 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한두 명의 이상한 사람보다 세상의 큰 흐름 탓이 크다는 것이다.
마음의 만렙:정상성 유지를 위한 레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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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갈수록 경쟁이 심회되는 가운데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경쟁에서 탈락시켜버리는 사회문화적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시험에서는 작은 실수도 실패를 의미하니 만점을 지향해야 하고, 취업을 위해 학점뿐 아니라 봉사나 외모까지 모든 스펙을 꼼꼼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요즘 우리 사회 모습이다.
이들이 바라는 정상은 심하게 건강한 ‘슈퍼노멀’이다. 완벽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운동을 시작하면서 “식스팩을 만들고 유지할래요”라고 몇 달 후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다. 식스팩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고달프다. 하루 종일 운동해야 하고, 닭가슴살만 먹고, 삶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우리가 보는 배우나 모델도 사실은 일정한 시간만 운동하고 절식을 함으로써 몸을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1년 내내 식스팩을 유지하는 체지방 2%의 몸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역치가 낮은 불안도 문제지만, 자신이 그리는 정상의 목표치가 비현실적인 것도 역시 문제다.
갈수록 정상의 범위는 좁아져서 완벽과 유사해지고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문제가 있는 고쳐야 할 증상을 가진 대상이 되어버린다. 사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낮과 밤을 가르는 경계를 분명히 시간으로 정하기 어려운 것만큼 모호하고 주관적인 면이 많다. 그러다보니 객관적으로 보면 평균 이상인 사람들도 주관적으로는 항상 모자라고 문제가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기 쉽다. 이런 환경에서는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다.
건강함이란 자신이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증상을 없애려 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이 정상의 범위를 너무 좁게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조금씩 이를 넓혀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 눈으로 보면 웬만하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이 더 많다. 완벽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의 갑옷을 먼저 벗어야 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고, 내 삶의 경쟁력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걸 확인한 다음에 차근차근 정상의 범위를 넓혀본다. 이 정도 게을러도, 이 정도 무질서해도, 요 정도만 노력해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고, 도리어 나도 편하고, 결과물 역시도 좋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