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201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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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에 관한 짧은 필름
Today, Tomorrow, Someday
최승우
아주 작은 것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순간을 가끔 경험한다. 사소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어떤 것에 대해, 처음 만난 사람이 작은 호감이라도 표시할 경우, 앞뒤 안 가리고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고 덥석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정확히 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때로는 손목시계나 휴대폰의 컬러링 따위가 사람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만든다. 세상에는 그런 게 있다.
폐가 떨리도록 울었다는 말에, 그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아니, 도대체 그걸 보고 왜 울어?” 그의 억양은 분명히 끝에 물음표가 붙어 있는 의문형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질문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의 말에는 어이없음과 조소의 뉘앙스가 노골적으로 묻어 있었다. 이유를 묻는게 아니라, 주성치 영화 따위를 보고 우는 사람이 있다니 웃긴다는 편협한 단정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그는 소통의 의사가 없다는 걸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그의 이미지-재미있고 지적이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는 한순간에 박살났고, 그 대신 헛똑똑한 꼰대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와 말을 섞지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남자와 여자는 백사장에 나란히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당신은 최고의 호스티스가 될 거에요.” 여자가 대답했다. “당신은 최고의 엑스트라가 될 거예요.” 세상에 최고의 엑스트라라는 게 있었던가. 그런 건 없다. 최고의 호스티스는...... 있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있다 해도 보통은 그런 걸 덕담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예를 들면 밤바다를 보며, 말도 안 되지만 악의 없는 칭찬을 서로에게 무심하게 건넬 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지난밤 섹스를 하던 자세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들쥐 둥우리만 한 남자의 초라한 방에는 1인용 간이침대 한 개뿐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집을 나서는 여자를 뒤에서 불러 세웠다. “어디 가요?” “집에요.” “그리고는요?” “출근해야죠.” “출근 안 하면 안 돼요?” 출근 안하면 당신이 먹여 살릴 거냐고 쏘아붙이는 여자에게, 남자는 멋쩍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봐요!” 다시 3초간 침묵, “......당신 앞가림이나 잘해요, 바보.”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여자는 활짝 웃고 있었다. 두 눈에서 주체 못할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라리 사랑한다고 말하는 쪽이 훨씬 간단했을 것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예를 들면 밤낮으로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끼고 다니지만, 아침마다 파도를 향해 “노력! 분발하자!”는 공허한 외침을 날리는 게 고작인 빈털터리 삼류 엑스트라처럼 변변치 못한 인생에게도. 그에게는 누굴 먹여 살리겠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보다 270배는 어려운 말이었다. 그가 진짜로 최고의 엑스트라가 되어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게 될 기약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쓴웃음과 몇 초 정도의 침묵이 필요한 거다.
다시 바닷가로 돌아와서. 여자가 말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남자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새벽이 되면 멋질 거예요.” 사람은 꿈도 없이 살아갈 만큼 강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단순하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막상 자각하기는 힘든 것. 지금은 깜깜한 밤이지만 오늘은, 내일은, 언젠가는, 아름다운 새벽을 볼 수 있으리라는 백치 같은 단순한 믿음. 미련하리만치 우직한 낙천성. 그래야만 서로에게 막연하게 정을 줄 수 있는 거겠지. 그런 것이 있어야만 무모하게 마음을 나누고, 당신을 먹여 살리겠다는 책임 못 질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제대로 사랑하려면 일단 단순무식하게 머리부터 비워야 하나 보다. 적어도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다면. 그 순간만이라도 행복하고 생생하게 깨어 있고 싶다면.
미안하지만, <희극지왕>을 보다가 울었다는 말에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진정한 친구는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맞지 않는 코드, 110v와 220v의 차이 같은 것이거든요. 억지로 비틀어 넣느니 애초에 빼버리는 쪽이 현명합니다.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은 삶과 사랑의 비의를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라면 싱크로율 90%쯤의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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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의 <희극지왕>을 보고 최승우님이 장백지가 <당신 나를 먹여살릴 수 있어요?>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던 것처럼 나 역시 그 대목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이 난다. 주성치의 영화는 코믹한 장면들에 웃으며 방심하면서 보다가도 이처럼 허를 찌르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있는 것 같다. 잡지 페이퍼 지나간 호를 들춰보다가 눈에 띄어 발췌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