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갖고 있는 거울의 방과 윤동주의 자화상
절친이 요즘 젊은 친구들이 좋다라고 얘기했다. <단순하고, 꾸밈없고, 계산없고, 영악하지 않은 모습>이 보기 좋다라고 했다. 난 젊은 친구들이 절친의 거울이 되어주었다고 얘기했다. 나의 애정하는 절친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성향이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아 그 친구가 만난 젊은 친구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는 몰랐었을지도 모르나 아마 절친의 성향에 물들어 젊은 친구들이 절친이 갖고 있거나 혹은 절친과 유사한 성향을 스스럼 없이 보인 것은 아닌가 라는 추측을 할 따름이다.
물론 친밀하다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거울 역할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거울역할을 하더라도 자신의 모습들, 다양한 모습들 전부를 한사람이 해내는 것 또한 아니기에 쉽게 일반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지향하는 성향이나 성격들, 갖고 싶은 성향들 성격들을 거울을 통해 가끔 자신을 성찰하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진다면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난 지금은 거울의 필요성을 적게 느끼지만 과거의 오래전에는 거울을 절실히 필요했었던 적이 있었다. 나 자신의 정체성이 어떠한 것인지 혼란스러웠고 그 이유에는 주변의 평판이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도 거울로 보여지는 지인들이 있었지만 그 지인들 사이에 있으면 난 거울의 방 속에 있는 것처럼 다각도의 거울로 방 전체가 뒤덮힌 곳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었고, 한마디로 정의되기에는 어려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묘사되는 인물로서 존재되었다.
어떤 거울은 평면이 아니라 오목하거나 볼록한 것도 있었기에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려면 할수록 아득해지는 정신머리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거울들에게 묘사되는 나 자신에 주의를 하고 귀를 기울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목 매고 있어 봤자 일정한 몇가지로 정리되지 못하는 혼돈으로 인해 그 거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체념을 하게 되었다. 너무 많은 정보는 때로는 그다지 쓸모없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어지기도 하였던 적도 있던 것 같다. 이것은 단순 추정이다. 내가 주변 사람들 스스로의 얼굴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멋지고 자랑스럽고 부러워 할 만한 것을 빛의 반사로 자각하게 하기도 했을 수 있겠지만 부끄럽고 암울하고 비도덕적인 것을 비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도 사람이라 상상을 하고 추정을 하듯 나를 바라보며 그들도 나에게 스스로와 비슷한 면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부끄럽든 자랑스럽든 내가 그들 각자와 같다라고 혹은 그들이 나와 같은 점이 있을 것이라 추론 하든 상상하든 교류하며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거울은 페르소나라는 개념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육학 시간에 좋은 교사는 학생을 대할 때 다양한 페르소나를 지녀야 한다라는 내용을 학습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야 다양한 성향의 학생들과 인간적 소통을 할 여건이 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페르소나란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의미한다.
윤동주는 시를 쓰면서 우물물을 들여다보았고 그 자신의 번민이나 부끄러움을 노래하였다. 거울의 방과는 달리 우물물에 비친 시인의 정체성의 정의에 대해 혼돈은 적었겠으나 갖고 있던 고민은 비슷할 수도 있겠다.
다음과 같다.
<자화상(自畵像)>-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사진은 대구의 김광석 거리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