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파트너를 원하는가?
모든 이성애 남자가 그러하듯 예쁜 이성을 원한다. 예쁘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외모 취향인지 옷 스타일은 어떤지 어떤 화장을 하는지 사람들이 논하는 것이 매우 많다. 거기에 빠져들면 광대한 논의 범위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져가기에, 그리고 필자는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고민한 바도 없기에 단정하고 귀여운 외모이면 좋겠다는 언급만 하고 이에 대해서는 이정도로만 정리하고자 한다.
그럼 과연 나는 어떤 파트너를 원하는가? 예전에는 자신만의 세계도 있었으면 좋겠고, 그 자신의 세계가 있기에 나의 정서적 세계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그리고 서로 긍정적으로 교류하여 관계에 있어 심심함도 권태감도 사라질 수 있게 되는 영감을 서로에게 주는 사람을 원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건 큰 낭만적 착오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세계가 있는 사람이란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고, 어느정도 자기세계가 구축되거나 구축되어가는 것을 원하는 진행형의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자기세계라는 것이 교류하고 싶을 만한 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잠깐 눈길을 끄는 이들은 대부분 말로 떠드는 자신의 세계와 실천 속의 자신의 삶이 일치되지 않는 허세형 인간들도 많았다.
작고 소박한 언어이지만 표현하는 자신의 지향하는 삶에 대한 자세나 미래, 성찰하는 자세를 항상은 아니지만 지향하고 실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건 남자 여자 구분할 것 없다.
난 일단 한 이성을 사귀면 그 이성에게만 충실하고 바람은 피우지 않아라고 고고한척 하지만 실상은 기회만 있으면 이성을 사귀고 있을 때든 아닐 때든 여전한 처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초면에 자기는 인상이 쎄 보일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아라고 말하지만 보통 알고 나서도 쎈경우도 있다.
차라리 자기는 말주변이 없다고 소개하고 그 후 차츰 자신이 적당한 상황 속에서라면 조곤조곤 의사표현은 잘 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드물고, 차라리 그런 모순적인 상황은 오히려 해악은 없다.
그 외에 더 나아가 나와 문화적인 세계에 있어 교류하는 것 그것에 대해 소망하는 것은 사치일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국엔 수용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 글은 나는 어떤 파트너를 원하는가이다. 일반적인 경우를 논하기보다는 나의 개인적인 경우를 좀 더 논할 필요가 있을 것만 같다. 좀 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바람을 적어보고도 싶다.
난 독서를 좋아하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문화생활에 있어 20대 초반에는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을 때는 문화적으로 공통된 코드가, 취향이 있는지 확인하고 얘기하길 즐겨했다. 하지만 내가 점차 나이를 먹어가고 문화적 코드에 대한 나열적인 확인과 소통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한 것이고, 교류할만한 상대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자. 나도 조금은 바뀐 것 같다.
독서에 있어서는 함께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느꼈다고 좋아하기보단 그 책에서 나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던 구절이나, 친구의 상황에 있어 위로가 되거나 들려줄 만한 의미가 있을 부분을 몇줄 안되는 분량의 글귀를 읽어준다로 변화하였다. 다시말해 그 책 전체를 함께 읽고 덕질을 함께하기보다는 내가 덕질한 것 중 일부분에 있어 나나 상대에게 의미가 있을 부분을 읽어주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해줄 만한 상대로 교류 대상이 확대되었다.
대신 그 어떤 책 전체를 읽고 감동하였다면 요즘의 문명의 발달로 SNS가 발달하여 그 작가와 직접 소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다음으로 사진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초창기 20대초중반에는 몇시간이고 자신의 심리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을 표현할 다양한 피사체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출사를 나가 그에 합당한 것이나 비슷한 것이 눈에 들어오면 찍었고, 소위 작품사진들이 결과물들로 나왔었다. 10여년간 사진을 찍어왔지만 초창기의 사진을 배울 때의 사진들과 같은 농밀한 결과물은 지금생각해도 탄생되지 못할 것이라는 감탄을 하곤 한다.(물론 나의 자체평가다)
사진을 배우던 초기에는 이사람 저사람들에게 주변사람들에게, 사진을 알던 모르던 나의 심리를 대변한 그것들을 사진들을 보여주었으나 까르멘은 이상한 사진만 찍어라는 평과 뭔지는 모르지만 대단하다라는 평을 보통 들었다. 문화생활에 있어 세계가 제대로 정립되고 구축되어가는 와중의 작업들이었고 나 자신이 정립되지 못했기에 사진을 알던 모르던 그들도 평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지금은 이해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 나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줄 사람을 얻지 못해 외로웠다.
하지만 지난한 시간이 지나면서 심리에 관한 작품사진을 찍기보다는 일상과 주변의 소중한 사람과 사물에 관한 사진을 찍는 것, 아름다운 것을 찍는 것으로 변화하고 스냅사진을 많이 찍게되는 근래는 사회적으로 초창기보다 많은 소통을 하고 평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대한 것을 소재로 한 덕질보다는 외부에 관심이 생긴 요즘은 나의 파트너가 내 농밀한 세계를 이해하고 평을 하는 피곤한 일을 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파트너가 나 자신의 모델이 되어 아름다운 앨범 작업을 만들어주었을 때 소중하고 기뻐해주면 나로서는 그 모델을 덕질하는 파트너로서 만족이다.
음악은 20대초반에는 가사가 의미있는 인디밴드들을 좋아해서 동류를 만나기도 어려웠고 그 밴드들의 음악을 함께 듣는 것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좋은 음악을 하는 밴드들은 결국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마련인지 수년간 시간이 지나자 매니아틱한 팬덤에서 대중적인 팬덤을 얻기 시작했고 그들의 음악도 세련되어져가서 이제는 동류를 만나기가 보다 수월해졌고 이제는 이어폰을 함께 꽂고 들어도 거부감은 들지 않게 되어 음악방송하는 DJ처럼 플레이리스트의 음악들을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난 함께 음악적 감성을 공유하는 함께 이어폰을 꽂고 같은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는 파트너를 원한다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음악을 듣는 폭이 보다 넓어졌는지 매니아틱한 인디밴드만을 고집하지 않고 보다 대중적인 취향으로 변화되었기도 하다. 나의 심경을 대변해줄 만한 음악들이 보다 많아졌고 이에따라 그것을 공유해줄만한 파트너의 폭도 넓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짤방 외에 아래의 사진 4장은 몇년전에 찍었던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