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에 관한 기억을 소환하면서...<신림동화실편>
2001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큐레이터에 관한 다음까페에 가입하였었고 그곳에서 화실을 이제막 개실한 사람이 화실에서 그림을 배울 사람을 모집한다는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이제 막 니콘FM2(필름카메라로 사진입문자에게 권장되는 권위있는 카메라이다.)을 중고로 구입하고 사진을 구상할 때 콘티같은 그림을 그릴 줄 알면 사진을 기획하고 구상하며 소통할 때 좋은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그림에도 관심이 있었던 때였다. 안느마리가 권장하던 공부의 한 종류로 미학이나 큐레이터에 관한 것도 있어 한창 그림책도 많이 보던 시절이었다.
대학에서는 입학하여 인간관계에 있어 부대낌이 많았고 적응에 애를 썼지만 에너지만 소모되었고 어려움이 많았다. 문화적으로 생각을 공유하고 관련된 생활을 함께 해나갈 동지를 얻지 못했고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 외로웠던 시기였다. 한편으론 혼돈속의 시기였지만 아주 조금씩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도중의 시기였다. 쉽게 말하면 인간관계에 있어 모든게 서투르고 시행착오가 많던 시기였다.
다시 화실 얘기로 돌아가면 그 화실은 내가 살던 대학 근처의 하숙집과도 거리가 먼 신림동에 위치했었다. 당시 지도서비스도 없던 시절 화실선생님의 안내로만 이야기를 듣고 화실을 찾아갔고 그곳은 반지하에 있는 화실겸 선생님과 친구의 공동주거공간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화실을 왜 다니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상담을 하고 첫날은 테스트로 줄리앙을 그렸던가 싶다. 미대입시로 짧은 기간 동안 속성으로 줄리앙을 그렸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구형의 석고모형을 그렸던 것 같다.
데셍 지도를 받으며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흥미있게 읽은 책이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포근할 정도로 안정감을 느꼈다. 미술치료에 관심이 있다고 했고, 아직은 어린 심리치료견 <날개>를 기르고 있었다. 날개는 선생님의 희망이라고 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 피드백을 주었는데 그날 그날의 내 감정이나 심리에 대해 논평을 하면 고마웠고 이해를 받는 것 같아 그림 그리는 보람을 느꼈다. 어떤 때는 음료수 병과 그 외 정물이 있는 것을 그렸는데 정석대로 안그리고 조금은 멋대로, 보이는 대로 그렸더니 피카소같다고도 했다.
가끔은 내가 가져온 테잎을 화실에 틀어놓기도 하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다. 내가 쓴 짧은 글을 보여드리기도 했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하루는 2001년 당시 작가 장정일의 연인인 신이현이 쓴 소설<숨어있기 좋은 방>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둘이 생각이 너무나도 닮았다고 얘기해주며 그 소설을 자신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읽었는데 마음이 많이 치유가 되었다고 소중한 추억이 있는 책이라고 하며 나에게 빌려주었다.
그렇다 이 블로그의 제목이 된 소설 책이다. 불행히도 그 책은 3분의 1정도읽었을 무렵 사정이 생겨 분실하여 돌려주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화실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소중한 단서를 잊지 않으려 블로그 제목으로 남겨 두었다.
인지하지도 고로 표현해내지도 못했던 고민이 많아 용기내어 포근함과 안정감을 주던 선생님께 전화를 하였는데 선생님은 <까르멘님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요...고민이 있으면 털어놓아요.>라고 말해주었다. 목소리든 그림이든 글이든 세심하게 나를 알아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많이 느꼈고, 나는 내 고민이 무언지 말로 설명해내지는 못했지만 난 그 말만으로도 이미 위로를 받은 것만 같았다.
내일이 없는 것마냥 하루하루 열정을 고갈시키던 염세적인 마인드의 생활을 하던 나를 경제생활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선생님도 가난 했지만 나 역시 가난했기에 선생님께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직장이란 것을 어떤 것을 가질 수 있을까 현실적인 고민을 해봤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의 화실은 번창하지 못해 몇 달이 안 되어 정리가 되고 나 역시 화실을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선생님이 카드회사에 취직을 하였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른다. 신용카드회사인지, 엽서같은 카드를 만드는 곳의 디자이너로 취직한 것인지 아는 바는 없다. 다만 힘겨웠던 시기의 나에게 위안과 심리적 안식처를 제공해준 선생님을 잊지 않고 싶어 두서없는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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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지나가버린 인연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 하지만 단순히 망각을 하기보다는 이렇게 머릿속의 이야기를 어떠한 공간에 쏟아내둠으로써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더이상 미련을 갖게 되지는 않길 나 자신에게 바랄 뿐입니다.
(사진은 퍼온 사진입니다. "숨어있기 좋은 방"과 석고상 "줄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