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정미경의 유작<가수는 입을 다무네>입니다.
슬럼프에 수년간 헤어나오지 못하던 가수 율의 다큐를 찍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입니다.
소설적 완성도는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이지만
천재라 불리는 창작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엿볼수 있는 대목이 많아 인상 깊었고 그 위주로 발췌하였습니다.
20180122
정미경의 <가수는 입을 다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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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스한 한낮이면 형은 폭 좁은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눈썹 사이에 주름 두 개를 잡고 잡고는 감정을 과하게 넣어 노래를 불렀는데 기타 소리를 배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근사했지. 그럴 때면 형 이마의 여드름마저 멋있게 보였는데, 기계가 재생하는 파바로티보다 바로 옆에서 내 고막을 떨리게 하는 엉터리 삼류 가수의 목소리가 훨씬 감동적이란 것도 그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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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밍업에 가까운 첫 노래가 끝나자 호영이 감탄사를 넣는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죽이네, 라고 호영의 마음 역시 여혜와 다르지 않겠지. 어떤 계기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예전의 율, 잠잘 때조차 오만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지독히 이기적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던, 무엇보다 노래하는 율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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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이 없는 사람의 단순한 소감 같은 건데. 올드 무무는 오히려 새로웠는데 이후의 그는 낡아 갔다고나 할까. 샤먼의 폭발하는 영적 기운 같은 게 사그라들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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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보헤미안 랩소디>를 만들기 싫어서 안 만들겠어? 길게 지켜본 건 아니지만, 제 손으로 우연히 부딪쳐 본 부싯돌에서 반짝 빛난 섬광에 매혹된 동굴 속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더라. 손가락에 피가 맺히도록 부싯돌을 맞부딪쳐 보지만, 이전과 똑같은 불빛이 어느 순간 터져 나올지는 몰라. 모르는 채로 그는 불꽃을 간절히 원해. 그게 어느 바람결, 얼마만 한 어둠, 어떤 에너지의 충돌이 어우러져야 피어나는 불꽃인지 모르는 거지. 누군들 검은 천공을 가득 채우는 불꽃을 갈망하지 않겠어?
환호를 보내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 버린 후에도 여전히 어둠 속에 홀로 남아 부싯돌을 쳐 대는 이에게 그 불꽃이 너무 작다고, 심지어 불꽃도 아니라고 지적하는 거, 그거 참 잔인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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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쥐어짜듯 노래를 만든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언제나 폭발하는 영감의 한조각을 낚아채는 거지. 수많은 나비 때가 일순에 날아오르는 것 같다고 할까? 그 중 한 마리의 날개를 부서지지 않도록 잡아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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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익숙한 음악은 듣는 사람의 뇌파를 진정시키지만 유혹하지는 못한다는 걸. 영혼은 해탈보다 유혹에 더 이끌리며 언제나 낯선 침입자와 춤추기를 원한다는 걸. 옛집에 머물기보다는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고 싶어한다는 걸.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그리하여 원심력에 열광하며 미친 듯이 길을 잃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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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가 젊음에 이토록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까닭은 우리가 지독히 야생적인 대륙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건 에드워드 호퍼였지. 세계라는, 명백한 약육강식의 삶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젊음의 속성인 무모한 도전과 탄성. 그리고 회복력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다 보면, 예기치 못한 섬광처럼 시력과 평형감각을 마비시켜 버리는 강렬한 젊음의 매혹은 그보다는 좀 더 미묘하고 모호하다. 막 젊음의 끝자리, 그러나 이미 지나온 쪽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경계에 선 사람에게, 젊음의 뜨거움과 중력이 유독 강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 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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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얼핏 익숙한 리듬과 납득할 수 있는 가사에 기꺼이 애정을 쏟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제 이성이 쉽사리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함에 열광하고는 혼자 있을 때 조용히 묻는다. 저게 뭐지? 그들은 변덕스럽고 나는 그 변덕스러움을 혐오한다. 그러니, 바보들이 이해할 수 없도록 하라.
음악은 질량이 없고 부피도 없이 우주를 가득 채운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 사랑의 순간은 절대 음과 같다. 단 하나의 음이 우주를 빈틈없이 채우는 순간, 귀로 들을 수 없는 음율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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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새벽엔 깊이 잠든 내 어깨를 흔들어 깨우기도 했지. 해이야, 일어나 봐. 머릿속에 노래가 가득차서 미쳐버릴 것 같아. 그럴 땐 높낮이도 감정도 없었던 전날 밤의 음울한 목소리는 누군가 가져가 버리고 다른 사람이 그의 몸속에 들어와 앉은 것 같지. 100미터를 단숨에 수직 낙하하는 듯한, 그런 낙차에서 생겨난 에너지는 나를 감전시키고,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감전시켰어.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그 사람도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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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꽃 같은 사람이야. 꽃은 다른 꽃을 바라볼 줄 몰라. 그 사람에게 세계는 오직 한 송이의 커다란 꽃이 피어 있는 정원이야. 유일한 꽃을 바라보듯 바라봐 주면 더 기이한 향기를 내뿜는 거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저 사람에게 아무것도 끌어낼 수 없게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