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8.<월급과 퇴직금과 장학금>
금전적으로 받기만 하던 시절에서 조금씩 줄 수도 있는시절까지
무언가 나의 노력으로 친척이나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기관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은 경험들을 차근차근 써내려가보고싶다. <지인들의 기억을 소환하면서>씨리즈는 잠시 보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고 과거를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 보일 수도 있는 글이 될 것이다. 특정 한 사람의 지인들을 소환하는 것은 아니나 어찌되었든 나 자신의 어렴풋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긴 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으뜸 주산 암산학원>을 다녔다. 누나들도 다녔던 곳이고 나는 아직 미취학 아동이라 주산, 암산 공부도 하였지만 뽀뽀뽀나 하나둘셋 같은 프로를 보며 아침엔 체조를 하고 간식도 먹으며 보육시설의 기능도 하는 곳에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칭찬받을 일을 하거나 성적이 우수하면 상으로 연필이나 공책을 받았고 난 그 받은 연필의 개수가 꽤 되어서 초등학교 4학년정도까지는 따로 연필을 사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시절의 기억으로는 스톱워치로 길고 긴 주산 덧뺄셈 문제를 푸는 시간을 재던 기억과 육선생님과 백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은 가에 대한 아이들의 열띤 토론, 숫자 6과 100을 연상하게 하는 선생님들의 성씨때문이라는 아이들의 토론? 이 기억난다.
1989년 초등학교 2학년이 거의 지나고 우리집은 아버지의 직장 발령으로 원주에서 강릉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이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강릉으로 이사를 가는 차에 타기 전에 여러색의 크레파스를 선물로 주었다. 당시 난 나무를 깎아 만든 장난감 칼을 들고 놀기 좋아했는데 그날도 난 그것을 들고 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선생님은 장군이 될라나? 하고 살갑게 날 대해주셨던 것 같다.
강릉으로 이사 오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또래 동성 친구들은 나에게 열쇠고리를 주기도 하고 액자를 주기도 했다. 마침 발렌타인데이가 겹쳐 이성에게서 초콜릿도 난생 처음 받아보았다. 또래의 이성이든 동성이든 또래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은 경험이 없었던 나는 너무 수줍고 부끄러웠고, 내게 일으켜진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화답을 해야 하는지 몰랐었다. 그리고 난 준비한게 아무것도 없어 너무 당황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과거 사교성이라고는 완전 꽝이었던 난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과 못난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난생 처음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액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것으로 당시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던 돌핀 전자시계를 구입했다.
장학금은 중학교 때에도 받게 되는데 그 당시 돌핀 전자시계가 고장이 났던지 하여 돌핀 전자시계를 하나 또 구입하였던 것 같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졸업할 때에는 무슨 지방 정치인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와 옥편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에도 수능모의고사를 보고 전교1등을 하여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걸로 당시에 라디오와 카셋트테이프와 CD플레이어가 함께 있는 제품을 구입하였다. 이것은 아직도 내방에 있지만 어딘가 고장이 났는지 라디오 기능은 지금은 잘 안된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모 출판사에서 다달이 나오는 학습지를 주었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학교 진도 따라가기도 숙제해나가기도 벅찬 곳이라 그리고 내가 따로 공부하던 문제집들을 해치우기에도 바빠 학습지는 반도 소화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장학금 얘기를 세 번이나 썼는데, 정식 장학금은 아니지만 설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세뱃돈이나 용돈을 받은 적도 많다. 그때마다 난 잘 모아두었다가 맛있는 것을 사먹은 적도 있지만, 주로 학용품이나 참고서나 문제집을 사느라 대부분 썼다. 학구열이 높았었고 그분들이 나에게 주는 장학금이라고 생각했기에 허투루 쓰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고등학교시절까지 무언가를 받은 기억들이다. 물론 주변 어른들이 책을 사주거나 옷을 사주거나 음식을 사준 것들도 있지만 그런것들까지 쓰자면 너무 많고 퇴직금으로 무얼하였나? 월급으로 무얼 하였나를 이제 밑에다가 또 써야하는데 분량이 길어질까봐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처음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근로자가 될 수 있다는 기쁨에 알바자리를 구했다. 술집이나 커피숍등을 시내에서 알아봤는데 대부분 경력자를 구했고, 나같은 초짜는 안받아주려고 했다. 사실 커피는 자판기커피정도, 술은 마셔본 적도 없었는데 그런 알바를 구하는게 어불성설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해보려고 했다. 한 커피숍에서 서빙을 했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배운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다. 하지만 초짜라 유리주전자를 깨먹기도 해서 1주일정도 일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일당은 제대로 정산해주었다. 그 돈으로 떡볶이와 튀김을 사서 집에 가서 내가 번 돈으로 산거라고 자랑하며 식구들과 먹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비디오방과 당구장, 한식집, 추억의 장난감 판매점, 보습학원의 국어강사등으로 알바를 하였고 방학 때는 강릉에서 민박집 알바를 하기도 했다. 집에서 생활비를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쳐주기도 하였지만 책을 사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공연을 보러 가거나 음악테입을 사거나 촬영할 때 필요한 필름값이나 인화 현상비, 화실강습비 등 취미생활을 하거나 하는 등의 문화생활에 드는 비용은 모두 알바한 돈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대학시절과 대학졸업이후 봉사활동을 많이 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 거리는 많지만 경제활동이 될 수는 없어서 이번 <월급과 퇴직금과 장학금>편에서는 안 쓰고 다음 기회에 적기로 합니다.
대학시절 보습학원에서 국어강사로 일해서 받은 돈으로 니콘FM2에서 니콘90X로 중고이기는 하지만 카메라를 업그레이드했다. 처음 중고로 구입한 니콘FM2는 아버지가 지원해주셨었다. 처음으로 오토포커스가 되는 카메라를 구입하였고 이 카메라로 베트남 해외봉사단에 참여하여 여러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문예창작과 지망학생들의 지도를 하는 사설교육기관에서 총무, 작은선생님으로 근무하고 받은 돈으로 캐논450D를 구입하여 필름값과 현상 인화비 스캔비를 대폭 줄이고 다량의 사진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카메라로 2011년과 2012년에 성당의 서대문구 마포구(합쳐서 2지구라고 통상적으로 부른다)의 청년연합캠프의 활동사진을 2~3천장 정도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연세대의 사회적기업에서 근무할 때 몇 달간 출장을 하여 전주에서 수천장의 사진작업을 하고 정리 편집을 하게 된다.
연세대의 사회적기업에서 근무하고 퇴사하여 받은 퇴직금과 사보제작 출판사에서 잠시 일한 것으로 2013년에 자생 한방병원에서 목디스크 치료를 몇 달간 받을 수 있게 되어 지금은 목 상태가 많이 편해졌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근무하여 카메라를 캐논50D로 업그레이드 하게 되고 지인들의 결혼식과 돌잔치, 재롱잔치, 절친의 모습만을 시간순서로 담은 앨범들을 만들어주게 된다.
요양원에서 퇴사하여 받은 퇴직금으로 지금 작업하는 노트북, 맥북을 구입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글들을 까페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된다.
그 후 도서관에 취직하여 절친이 간절히 바라던 노트북도 선물해주게 되고, 만15년간 쓴 중고 세탁기를 처분하고 새것을 장만하고 복합기도 구입하게 된다.
31세 이후로는 알바가 아닌 4대보험이 되는 회사의 형태를 지닌 곳에 일하게 되어 명절마다 부모님들에게 작은 선물을 안겨드리게 되고 누나들과 조카들에게도 가끔 간식거리나 선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때까지는 금전적으로는 받기만 주로 하였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직장에 다니기 전에는 알바도 하며 간간히 주기도 하였던 것 같다. 금전적으로 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으니 정서적인 지원을 하고 그런 것들을 계발하려고 애썼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31세 이후로는 점차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고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실제로 한국에 그런 부류가 있을까?하고 의문이 들고 아직은 만나본 적은 없어 정확히는 잘 모르나...)일에 치여 시간을 함께 못하는 대신 금전적으로만 베푸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시간과 정서와 금전을 함께 베풀 줄 알고 주변의 많지 않은 사람들과 행복해져 가고 스스로도 전문적인 능력이 있는 사회인이 되고 싶다.
(위 네장의 사진들은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입니다. 강릉 서울 대구 등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