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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란 해당 분야의 모든 실패를 해본 사람>

by 까르멘 2018. 3. 26.




20180324전문가란 해당분야의 모든 실패를 해본 사람



경험이 적으면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이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기 어렵고 갈팡질팡 하기 십상이다. 직접경험 외에도 주변사람이나 멘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조언들이나 강좌들로 혹은 매스미디어와 책들을 통해 간접경험들로 판단의 기준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청년의 시기란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 쌓여만 갈수록 과거의 나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부족했다는 것을 확인하게되고 갈팡질팡 시행착오들로 나라는 사람을 세워가는 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문가란 해당분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실패를 한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난 실패나 좌절이 많고 이를 통해 경험을 쌓아간다는 측면에서, 다만 그 분야가 어떤 분야인지는 언어로 규정할 수는 없으나 하여간 전문가가 되어가는 와중인가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싶다. 내가 일한 곳 중 처음 좌절을 맛본 곳에 대해 처음으로 글을 써보기로 한다.




20대후반에 근무하던 그곳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곳은 소송이 걸려서 그제서야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아 운영하던 사설교육기관이었다. 물론 그곳에서는 근로계약서도 없었고 4대보험 혜택도 없었다. 사실 학원에서는 강사나 직원을 일반 아르바이트생에게 갑종근로소득세만 제하고 4대보험 제공없이 임금을 지급하는 것처럼 강사나 직원을 쓰는 경우가 많으니 그것까지는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근로계약서도 없이 직원을 채용하는 체계가 없던 기관이었다. 




내가 일하던 몇 달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총무로서 작은선생님으로서 일을 하는 내내 나는 전에 일하던 직원이 소송을 걸었던 것에 대한 울분과 격노를 고스란히 들어줘야 했고 문예창작과 지망 고등학생들의 수업준비를 하던 나는 학생들에게도 그 울분과 격노를 정신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진행되는 분풀이를 하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나와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어 그런 울분과 격노를 들어야만 하는지,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직원이니 기관의 사정을 파악해야하는 측면에서 인내하고 들어야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수업료를 내고 수강하러 온 학생들은 사장 개인의 사정을 들어야할 이유를 못 느끼겠다.




그 울분과 격노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사설교육기관으로서 사업을 하려면 사업자등록증이 필요한 것을 몰라 사업자등록증 발급받지 않고 운영했다. 그리고 여기는 단순 학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2.학생들에게 나는 하버드대학이나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하버드대학이나 서울대에 있지도 않을 만한 터무니 없는 학과를 나왔다고 얘기하며 상식있는 사람이라면 농담으로 들었을 만한 내용이었다고 주장했다.  




3.나는 문예창작과 지망 고등학생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았었다. 그런 신을 무례하게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사실 학생들이 백일장을 나가기 얼마 전 과제로 백일장에 나온 주제로 수업을 한 적이 있고 마침 그 주제가 백일장에 나와 좋은 점수를 받아 2~3명의 학생이 선생님은 신인가봐요! 우와! 한 적이 있는데 자아가 비대한 이 사람은 자신은 신이라고 학생들에게 여러번 강조하며 그러한 대우를 해주기를 바랬다.




4.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본인의 자유로움은 허용되어야 하지만 학생들은 도제식으로 교육을 진행하며 자신에게 예의가 깍듯하며 존중해줘야 한다고 교육한다. 이율배반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5.여학생들과 포옹을 하는 등 교사로서 적절하지 못한 스킨쉽이 있었다. 이런 것은 유럽에서는 보편화된 반가움이나 인사의 한 방식이다라고 주장한다. 사실 평소에는 한국식 예의를 차려 자신을 깍듯이 대해주길 종용하지만 자신의 욕구에 관하여는 유럽스타일을 차용한다고 생각이 든다.




6.자신은 학생들을 인솔하여 가끔 밥을 사주기도 하는 인자한 사람이다. 사실 밥을 한 번 살 때마다 온갖 생색을 내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가끔 음식에 작은 실수가 있거나 맛이 자신의 입에 맞지 않으면 주인을 불러 호통을 치는 경우가 가끔 있어 맘 편히 밥을 먹는 것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1~6까지의 레퍼토리는 내가 일하던 몇 달동안 주구장창 반복되어 지금까지도 생생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책을 여러권 써낸 유명작가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시집 두권이 출판된 사람일 뿐이었다. 다만 평론하는 데에는 소질이 있어 그나마 교육기관을 운영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곳에서 몇 달 동안 지내다보니 심신이 피폐해져갔고 한국의 문단이란 모두 이런 세계일까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글을 더 이상 쓰는 데에 환멸을 느꼈다. 예술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 환멸을 안겨준 이 곳 덕분에 순수 예술인이 되는 목표는 얼른 한 수 접고 일반 회사로의 진로를 개척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암수술도 겹쳐 무언가 의탁할 만한 곳을 찾게 되고 나는 천주교의 세례를 받게 되고야 만다.



(사진은 퍼온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