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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사회적기업, 요양원 세군데에서의 회의를 경험하면서 느낀바에 대해

by 까르멘 2018. 3. 26.


20180324성당_사회적기업_요양원_회의


난 왜 배워도 배워도 배울 것이 끝이 없고 세상은 자꾸 한걸음 나아가는 것만 같고 거기에 속도를 맞춰가야하는 것처럼 느낄까?라고 한숨을 쉬곤 한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데에는 다양한 환경에 새로이 맞부닥치는 여정을 계속해 왔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그 여정 중, 성당에서 진행되는 각종 회의와 대학에 소속된 연구사업지원에 관한 사회적기업에서의 회의, 요양원에서 진행되는 교대근무에 필요한 인수인계회의 등 회의에 대해 경험한 바를 토대로 소감을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2010년 1월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아나스타시오라는 세례명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집과 가장 가까운 홍제동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그곳 성체분배봉사자의 인도로 전례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나의 천주교 신자로서의 성당생활이 시작되었다. 성당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 없는 전직(?) 불교신자(?)로서의 생활이었다. 



매주 청년미사에 참여하였고 미사 전후로 회합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내가 속한 전례단은 신부님의 미사집전시 미사의 진행에 필요한 보조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봉사단체였다. 미사전 회합에서는 단장의 주도 아래 복사, 주송(해설), 독서, 기도 등의 역할을 분배하고 연습을 하고 성경에 대해서나 친교에 대한 화제를 갖고 이야기를 갖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미사후 회합에서는 오늘의 전례에 대해 점검과 반성을 하고, 제일 중요한 저녁메뉴를 정하고 음주를 하게 되며 천주교라는 타이틀 아래 다양한 화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난 처음 성당생활을 하며 모든 것이 낯설었고 기도문을 차츰 외우고 전례에 대하여 교육을 받으며 가끔 성당 청년 전체의 행사나 모임, 엠티가 있을시에 사진촬영을 맡기도 하며 2010년 한해를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준비하던 중등교원임용고사에는 낙방하였지만 연세대의 사회적기업에 취업이 되어 12월부터 출근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말 토마스신부님의 주최로 청년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총회가 열리고 추천을 받아 그리고 투표를 통해 1회 청년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회장이란 사람은 무얼 해야 하는지 전례가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으나(사실 그 전에 홍제동성당에 청년회장은 있었으나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선출되었고 유명무실하여 실질적으로는 내가 1회 회장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어떤 고난이 닥칠지는 하나도 모르는 채 조금은 들뜨게 되었다. 



일단 새해 첫날 주임신부님과 보좌신부님께 세배를 하면서 뒷풀이를 가게 되는데 청년들은 다양한 행사가 있기를 바라는 청년들의 활성화를 바라는 의사를 많이 표현하였다. 한동안은 공식적인 절차상의 회의는 아니나 비공식적인 모임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체계는 부족한 시스템의 회의를 하게 되고 관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나는 선별하여 수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보좌신부님과 가정사목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하는 월례회의를 통해 마찬가지로 조언을 듣고 청년들의 과월 행사나 모임, 다음달 행사계획이나 모임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전례단 외에 성가대나 밴드부 레지오의 단장들을 모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을 공식화 하고 단체장회의를 개최하고 싸이월드 홈페이지를 개설하게 된다. 



새로 기틀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미래에 청년연합회가 어떤 업무를 정형화하여 수행하게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의논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2지구 청년회장들의 월례회의(서대문구, 마포구의 성당을 합쳐 2지구라고 통상적으로 말한다. 2지구 담당 신부님의 주최로 열림.)에 참여하여 다른 성당의 수행한 행사내용과 계획을 들으며 홍제동성당에도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홍제동성당 청년연합회의 창업기였기 때문에 관례를 찾기가 어려웠고 당연히 전에 하던 거 이어서 따라하면 되지 하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내가 주최하는 회의는 안건을 제시하고 업무를 분배하는 단순하고 기능적인 회의가 될 수는 없었고, 큰 의제는 내가 제시하지만 중구난방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무리한 의견도 모두 귀담아 들어줘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홍제동성당에 들어온지 만 1년도 채 안되었기 때문에 어떤 청년이 어떤 것을 중요시 여기는지 어떤 기능을 잘 수행하는지 아는 바도 적어 이를 파악하려면 그들을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게 하고, 일을 수행하고 싶어 하도록 이끄는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추진하다보면 알력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책임자가 되면 감수해야할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감내하였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인사이동시의 송별회, 선물, 피정, 연합캠프, 소풍, 신부님의 축일, 학사님의 독서직 수여 행사, 2지구 행사, 청년연합 성가대회 등의 여러 행사를 열었으며, 업무보고서가 될 다양한 사진들은 촬영을 담당할 적임자가 보이지 않아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당에서 회의에 참석하기도 주최하기도 하면서 성당회의가 추구할 점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느낀점을 말하자면, 천주교라는 타이틀 아래(이 비중은 실제적으로는 적을 수도 있으나 성당의 예산을 보조 받기 위해 명목상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성당모임을 주최하기 위한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청년 남녀들의 교류를 통해 이성교제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다양한 술과 음식, 신앙생활을 포함한 문화로 청년신자들이 모일 구실을 만들어 활성화할 방안을 만드는 것이 성당에서 개최되는 회의의 궁극적인 추구하는 바는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사회적기업에서의 회의에 대한 경험을 적어가자보면 다음과 같다. 연세대의 주거환경학과 교수님이 만드신 사회적기업에서는 일반 영리추구 목적의 회사도 아니고 교수님 산하의 여러 연구소처럼 연구기관도 아닌 정체성이 모호한 곳이었고, 창립멤버는 아니었지만 회사가 어떤 업무나 아이템을 가지고 추진해야 할지부터 회사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여야 했다. 



정부의 지원금이 중단되고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할 인력은 나를 제외하고는 실장님 부장님을 포함하여 모두 퇴사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머지 인력은 주거환경학과 대학원생이나 연구원들의 연구 등 연구사업을 서포트하는 시스템으로 굳어져 갔고, 나는 대리이지만 총무로서의 온갖 행정과 간단한 회계업무를 회계사와 연계하여 수행하고 사진촬영이 필요한 연구사업에 투입되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회사운영이 진행되다가는 사회에 공헌하는 취지의 사업아이템을 살릴 수가 없어 사회적기업으로서 정부지원금을 다시 받는 것은 소원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 일본어, 영어, 중국어와 영어에 유능한 고령의 위원님들이 있어 이 인력으로 대학원생들의 논문영문초록이나 해외서적의 번역업무로만 활용하여 당장의 연구지원에만 사용하지 말고, 외국인 상대로의 관광안내 등으로 업무시스템을 바꾼다면 전문적인 취약계층의 고용으로 사업아이템이 잡혀 사회적기업으로서 인증을 받을 가능성이 생길 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같은 사무실을 쓰는 박사님들과 담배회의를 하면서 온갖 궁리를 하여도 카리스마있는 관록있는 그리고 깐깐하게 체크하시는 교수님과의 회의에서 나의 논리를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교수님의 기에 눌려 근거나 비전을 제시하기에는 무리였다. 차라리 제안서를 간략히 작성해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제안서를 작성하기에도 경험이 부족해 막막할 따름이었다. 



사실 교수님도 사업아이템이나 수익모델에 대해 고민을 제일 많이 하였지만 당장의 연구가 급하신 분이었고 관성에 따라 회의가 진행되다가 결국에는 계속적인 적자로 사회적기업의 운영이 어려워 결국에는 문을 닫게 되고 행정상 마무리와 가구나 집기등의 처분까지 실무는 내가 처리하게 되고 만다. 



참고로 교수님이 진행하는 회의는 교수님의 카리스마로 쏟아지는 업무분배를 메모하기에도 급급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면 담배를 세대는 피워야 마음이 진정될 정도였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교수님 아래의 박사님(연구교수님)들과는 그나마 문답과 함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표현은 하게 되었는데 보통은 담배를 테라스에서 피우며 커피와 함께 진행되는게 보통이었다. 세상의 돌아가는 시사적인 문제부터 당장의 논문지도와 애로점과 함께 박사님들도 토로하는 교수님과의 회의 후 펀치를 맞고 업무에 시달리는 고달픔과 원망과 넋두리를 들으며, 신중하게 나도 나의 고민한 바를 얘기하면 학사학위밖에 없는 나를 많이 존중해주고 좋은 의견일 경우 좋은 아이디어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사람과 세상에 관한 철학에 대해 때로는 고급진 언어로 혹은 세속적인 언어로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대한 의문점에 대해 박사님들은 항상 진리에 대해 갈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연세대에 있을 때는 당장의 업무도 업무이지만 연구소적인 성격도 함께 있어 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 또한 회의의 연장이었던 것 같다.



참고로 성당에서 청년회장을 하고 그 외 임원을 하던 시기와 연세대에 있던 시기는 비슷하다. 온통 회의와 함께 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걸 어떻게 함께 수행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그 다음으로 요양원에서 진행되는 교대근무에 필요한 인수인계회의를 얘기하자면 이것은 순전히 창의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인수인계회의를 하는데 야간조와 낮근무조 간의 필요한 인수인계와 원장님이 주도하는 회의에 필요한 내용들은 성당에서 혹은 연대에서 경험한 회의에 비해 비교적 정형화되어있고 어떤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하고 업무를 수행해야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고참들로부터 전수가 되기 때문에 선임자들의 말빨이 잘 먹히는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새로이 고민하거나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예전에 이렇게 대처했었지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어르신들의 배변이나 식사, 운동, 수면, 매일 복용하는 약, 목욕이나 청소, 어르신들 간의 교우관계, 그 외 건강과 관련된 사항 등에 대해 특이점을 각 방담당의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원장님과 실장인 나에게 보고하고 대처방안에 대해 지시하는 형식으로 회의는 진행되었다. 



6개월 정도가 지나자 관례를 어느정도 습득하게 되었고, 요양원의 인수인계 회의에 능숙하게 적응하게 될 때 필요한 것은 관례를 학습하는데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이 든다.



성당, 사회적기업, 요양원, 세 곳에 대한 회의에 대해 간략히 적어보았다. 그 많은 회의를 거치며 나에게 남은 것은 무얼까라고 생각도 해본다. 실질적이든 개념적인 것이든 남는 것은 무언가 분명 있을 것이다. 다양한 여러 가지 가운데, 나는 무언가 기존에 하던 것과는 관련성이 적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였고 청춘의 어떠한 시기에 나를 내던져 담금질 했었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부를 축적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만 아쉽게도 부는 나와 거리가 멀었다.ㅠ.ㅠ



(위 세장의 사진은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