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있기 좋은 방>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에는 소설가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읽고 인상깊거나 공감되는
부분들을 발췌하였습니다.
소설가의 일 –김연수
읽고 정리 발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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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어떻게 해서 소설가가 됐느냐고 물을 때마다 1989년이 떠오른다. 그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해로 내게 남아 있다. 나는 영문학과 신입생이었는데,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모르니, 영문학과 신입생으로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막막한 시간들이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잔디밭에 누워 당신의 하얀 미소처럼 저 하늘 위를 떠가는 흰 구름을 올려다봐도 시간이 남았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결국 나는 중앙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앉아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노트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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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 편씩, 때로는 몇십 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게 주인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나면 그건 도무지 내가 쓴 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새로운 사람, 즉 신인(新人)이 됐다. 지금도 누군가 신인이라고 말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건 마치 매일 매일 획기적으로 나아지거나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았던 그 맛을 결국 영원토록 잊지 못하게 됐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평생을 다 보내고 뒤늦게 발견한 시가 좋아서 밤낮없이 시를 쓴 끝에 일흔 살 할머니가 마침내 신인으로 등단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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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에 너무나 완벽한 친구가 있었다. 변호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수재였다. 게다가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서 모든 여자애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 친구에 대한 내 감정이란 그저 질투, 오직 질투, 활화산처럼 밤이나 낮이나 활활 타오르는 질투뿐이었다. 그래서 조금의 흠이라도 잡아서 위안을 삼으려고 했지만, 글쎄 그게 잘 안되더라. 그러던 어느 10월의 어느 화창한 토요일, 우연히 둘이서 하교하는 길에 나도 모르게 그에 대한 부러움을 털어놓았다. 말해놓고는 민망한 마음에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는데 녀석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셔츠를 걷어올리는게 아닌가! 그러니까 셔츠 속 맨살에는 끔찍한 상처가 있었더라는, 무슨 진부한 라디오 사연 같은, 뭐 그런 내용의 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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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아일랜드 작가 브랜던 비언이 한 말이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길.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비평가들이란 하렘의 환관과 같다. 매일 밤 그곳에 있으면서 매일 밤 그 짓을 지켜본다. 매일 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걸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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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를 발표했을 때, 읽어보지도 않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일단 두꺼우니까. 오랜 팬에게는 질보다는 양이다. 질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잘 느껴왔으니 이제는 양, 오직 긴글,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긴 글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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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세상의 갖은 방해=생고생(하는 이야기)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은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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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랑은 이 반대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즉 한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그에 관해 더 구체적인 정보를 남들보다 더 많이 듣게 되면, 결국 우리는 그의 삶에 감정이입하게 된다. 감정이입하게 되면, 그의 삶이 어떤 스토리로 보이면서 그의 성격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성격이 매력적이면 외모도 매력적으로 바뀐다. 캐릭터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캐릭터는 이미 만들어졌다. 단지 우리에게 감정이입할 시간과 노력이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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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동서고금의 좋은 책들을 다 연구해보니 이 문제에 있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의견이 같으시다.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나부터 죽어야 한단다.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 번 다시 태어나보겠지만, 죽지 않고 어떻게 다시 태어나나? 내 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돌이켜보면 이십대의 문제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되려면 제일 먼저 내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 모든 건 내 쪽의 문제였다. 그런데 나는 가만히 놔두고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니까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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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살아오면서 몇 번,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인가 벌어질 텐데 그러고 나면 이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예감할 때가 있었다. 그 한 번은 1989년 2월, 대입 후기시험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혜화역 4번 출구의 기나긴 통로를 걸어갈 때였고, 또 한 번은 1994년 4월,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에 내 소설이 당선 됐다는 연락을 받고 출판사 앞까지 찾아갔다가 차마 올라가지 못하고 일층 까페에 앉아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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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향하는 다리를 건넌 뒤에 나는 되돌아갈 수 없게 다리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나는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대부분의 인생에서는 그게 다리였는지도 모르고 지나가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늦게 그게 다리였음을, 그것도 자기 인생의 이야기에서 너무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생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닮은 소설, 그러니까 지나가고 난 뒤에야 앞부분의 어딘가에 결정적 순간이 있었음을 깨닫고, 모든 이야기를 다시 쓰는 그런 소설 말이다. 그렇게 해서 쓰게된 소설이 <굳빠이,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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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고?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소설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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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자신의 캐릭터 설정 때문에 다리를 불태우면 캐릭터 중심, 캐릭터 성격과는 무관하게 외부의 사건 때문에 다리가 불타면 플롯 중심이다. 캐릭터 중심의 소설은 내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느리며, 플롯 중심의 소설은 외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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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은 전체적으로 봐서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판돈을 계속 높여나가는 도박과 비슷하다. 실제의 도박이 그렇듯, 위대한 플롯은 주인공의 삶 전체를 담보로 걸고 마지막 승부를 향해 나아간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이 이미 간파했듯이, 이게 우주의 원리이고 모든 이야기의 구조는 이 원리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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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소설이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쓰는 나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쓴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쓰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그러니까 먼저 소설가가 되라고 말한다면 순서가 잘못됐다. 소설가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쓰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리에 따라 먼저 뭔가를 쓰고 좌절하고 다시 쓰고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다시 쓰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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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이라는 것도 그와 비슷해서 끝까지 소설을 다 쓰고 나면 그제야 그게 어떤 플롯인지 결정된다. 순서를 잘 기억하는 게 좋겠다. 소설을 다 쓰고 난 뒤에 우리는 플롯을 짤 수 있다. 플롯부터 짜고 소설을 쓰는 건 뭐랄까 바지 위에다 팬티를 입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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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전락의 이야기보다는 회복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전락의 이야기는 대개 비슷하게 전개돼 개성있게 쓰기 어렵지만 회복의 이야기는 천차만별이라 서사적으로 더 우월하기 떄문이다. 마찬가지로 악(증오)의 이야기로는 진부한 이야기를 쓸 가능성이 많다. 지금 우리가 신문이나 방송으로 접하는 모든 범죄자들의 이야기가 진부하기 짝이 없듯이 말이다. 그들은 모두 카인의 후예일 뿐이다. 말하자면 카인 이야기의 표절자들이다. 하지만 선(사랑)의 이야기는 모두가 오리지널이다. 만약 소설을 쓰는데, 뭔가 파괴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좀더 어렵고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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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많이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세상의 갖은 방해=생고생(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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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09년 4월 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친구와 언쟁을 벌이고 난 뒤에도 나는 내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절과 환희를 지켜본 나는 어느 틈엔가 그의 이야기에 감정이입된 독자와 같은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서 좌절과 환희를 맛봤다면, 치욕이라고 왜 맛볼 수 없겠는가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남몰래 연애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욕한대도 나만은 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감정이입이란 그런 것이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건 마치 사랑 같은 것이다.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머리로 설명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지난 일을 생각하다가 불쑥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정말이지 그건, 사랑을 앓은 느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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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대한 소설가들은 자신이 쓸 수 없는 것을, 몰랐던 것을 쓴 사람들이다. 소설가의 첫 번째 일은 초고를 쓰는 일이다. 그 초고를 앞에 놓고 이렇게 묻는다.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쓸 수 없는 건 무엇일까? 그렇게 해서 일단 모르는 것, 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소설가의 두 번째 일이고, 모르는 것을 알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게 세 번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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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쓸 때, 생각하지 말자고 한 것은, 생각을 생각할 생각도 하지 말자고 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소설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 단어들로 문장을 쓰는 일이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뭐가 보이고 들리고 맛이 나고 냄새가 나고 만져지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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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권의 책을 펴내고 나면 머릿속은 과묵해진다. 그 이유는 조금 뒤에 자세히 설명할 텐데, 자신의 경험으로 쓸 수 있는 소설은 한 권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변형시키며 평생 여러 권을 쓸 수는 있겠으나 자전적 의미의 소설은 한 권뿐이다. 그 다음부터는 상상력이 필요한데,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문장은 그다지 많지 않다. 친구들에게 들려줄 때는 정말 멋진 이야기였는데, 그걸 문장으로 옮기려니까 한 줄도 안나오는 건 문학적 재능이 없거나 문예창작과를 안 나왔거나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쓰려는 그 이야기에 대해 사실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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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교황의 배가 마리아 상을 든 신부를 태우고 로마에서 올 것이라는 조상들의 말만 믿으며 그 배가 나가사키에 올 때까지 숨어서 천주교를 믿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언은 이뤄진 것일까, 이뤄지지 않은 것일까? 그 예언을 믿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생전 마리아 상을 보지 못했으니 이뤄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이백오십년 뒤에도 그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은 마리아 상을 봤으니 예언은 이뤄진 것일까?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시 조금 세월이 흐른 뒤에 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백여 년 뒤인 1981년 2월 25일 눈이 내린 나가사키 공항에 교황 바오로 2세가 도착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