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9 엄마와의 유년기의 추억
엄마와의 추억을 적어보자니 엄마에게 서운한 것들부터 떠오른다. 이해받지 못하고 상처받고 하던 일들. 흔히 모자간에 있을 수 있는 일들로 여길 수도 있으나 서운한건 서운한 일이다. 하지만 이 글은 어머니에게 선물로 쓰는 글이기에 그런 것들은 잠시 잊고 되도록 좋은 기억들만을 살려서 적어보려고 한다.
난 강원도 원주의 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누나들은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누나들을 데리고 집에서 출산을 하기에는 버거워 119를 불러 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정일을 한참 넘겨서. 하지만 이런 일들은 나중에 커서 들은 얘기들이고 사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떤 경황이었는지는 물론 기억이 안 난다.
어릴 때 원주에서는 9살까지만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니고 아버지 직장발령으로 강릉에서 살게 되었다. 원주에서의 시절에 대해 내게 남아있는 기억은 대체로 풍성하다. 집에서 닭을 키우기도 하고 토끼를 키우기도 하고 개를 키우기도 하고 새장 속에서 새를 키우기도 하고 벽돌로 어항을 만들어 잉어를 키우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엄마는 참 대단해보였다.
이 동물들이 식용으로 쓰인 적도 있는 것은 때론 가슴 아프기도 했다. 엄마 미워를 연발했는지 아니면 속으로만 눈물을 흘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토끼고기를 먹을 때의 서글픔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계란 후라이는 맛있었다.
화분이나 나무도 많았는데 그 많은 화분이나 나무 중 기억나는 것은 대추나무와 목련 그리고 크리스마스 트리로 쓰인 화분이 기억난다. 대추나무는 가을이면 점프해서 열매를 따먹을 수 있어 즐거운 나무였고 목련은 어릴 때 뭘 모르던 시절에도 그 꽃이 너무 예쁜 것은 알았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누나들과 나와 엄마는 적당한 화분을 골라 반짝이 줄을 휘휘 감아서 트리를 만들었다. 집 식구 중에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런 건 어디서 봤는지 들었는지 들뜨면서 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하니까 산타할아버지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시절 밤늦은 시간에 집 문을 열고 살금살금 장난감 로봇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난 그날까지만 해도 산타할아버지를 믿었었다. 싱숭생숭해서 잠을 못자고 산타할아버지를 기필코 만나야겠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을 안자고 있던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빠와 엄마와 마주쳤는데(지금도 기억한다. 자붕글 펀치 합체로봇) 멋쩍은 엄마와 아빠는 “산타할아버지가 바빠서 저쪽 골목에서 만나서 엄마 아빠보고 철훈이한테 대신 건네주라고 하더라”고 했다.
겉으로는 매우 기뻐했지만 속으로 “아 산타할아버지가 엄마 아빠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기운 빠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집에서 요리를 많이 했었다(과거형이다) 도너츠나 감자튀김, 탕수육, 딸기쨈, 포도쨈, 수박화채, 돈까스, 김굽기, 그 외 반찬거리나 간식거리 등등과 카스테라(카스테라 케잌 만드는 하늘색 기기도 구입했었다.) 그 중 카스테라나 도너츠 이런 것들은 가끔 실패작이 되어 삼남매는 엄마의 정성을 감안해 다 없어질 때까지 며칠이라도 간식으로 이걸 먹어야만 했던 적도 있다.
한번은 카스테라 만드는 기기를 들고 동네 이웃집에 갔었다. 카스테라 반죽을 기기 안에 넣고 기기를 돌리는데 카스테라가 되어가는 중에 엄마는 이웃집 아줌마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흘러 난 혼자 놀다가 냄새가 수상해서 카스테라 만드는 기기의 유리부분에(안을 볼 수 있게 되어있었음) 눈을 대고 보니 ‘이거 분명 지금 안 꺼내면 다 타먹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를 불렀으나 엄마는 “아냐 아직 멀었어~”하고 계속 수다를 떨었다. “엄마 이거 다 타는 것 같다니까!”하고 소리를 지르자 “어머 시간이 이렇게?” 결국 열어보니 반쯤 타버리고 말았다.
한번은 그 이웃집에 엄마와 함께 놀러갔다가 난 혼자 노는 게 너무 심심해서 집으로 먼저 가겠다고 하고 집으로 가는데, 어린아이였던 나에겐 대형견으로 보이는 흰(?) 커다란 개가 보였다. 반갑게 인사하고 길을 가려는데 이 개가 나에게 슬슬 걸어와 내 가랑이 사이로 들어오려고 했다. 자기 등에다가 태우려는 듯이. 나는 이 개가 너무 무서워 “엄마~!”를 소리 높여 외쳤지만 엄마는 집안에 있어서 잘 못 듣고 난 겁에 질렸다. 동네 아저씨가 쇠막대로 훠이훠이~해서 개를 쫒아보냈지만 다시 그 개가 다가와 “엄마~!”를 계속 부르다가 울며 지칠 때쯤 엄마가 나와서 하는 말이 “밖에서 뭔 소리가 나던데 넌지 몰랐네 미안해~”했다. 엄마는 청심환을 저녁에 먹이고 옷을 갈아입혀 줬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하교 후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데 엄마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담을 넘고 장독대로 조심조심 가서 계단으로 내려오고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연기가 자욱했다. 처음엔 불이라도 난 건가 싶어 당황했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매연이 가득해서 각 방을 잠깐 들어갔다가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가 하다가 주방에서 냄비의 국이 다 쫄아서 그리고 플라스틱 뚜껑 손잡이도 다 녹아서 그 연기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풍기를 돌리고 문도 열어서 연기가 빠져나가게 하였다. 창문은 뻑뻑해서 어린이의 힘으로는 열 수가 없어서 다는 못 열었다. 현관문 밖으로 나오는 매연은 너무 무서웠다.
결국 엄마가 왔을 때는 상황이 진정이 되었는데, 엄마는 “아빠한테는 비밀이야~찡긋^^”했다. 그 이후 십수년이 지나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고 생각되어 엄마 아빠가 같이 있을 때 옛날에 그런 일 있었다고 하니 아빠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평생의 비밀인양 지켜야할 것처럼 생각했었는데 말하고 나니 마음의 무거운 짐이 덜어졌다. ㅋㅋ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수두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나를 업고 학교까지 가서 조퇴를 맞게하고(결석 처리 안되게 하려고-지금이야 개근상 받는 학생은 다양한 학교 외 생활을 못하는 것이라는 인식까지 있기도 하지만...) 집에서 쉬게 해주었었다. 느닷없이 비가 오면 학교에 우산을 들고 오는 엄마이기도 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누나가 도시락을 안 싸간 날이면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갖다주고 오라고 한 적도 있는데 도시락을 들고 가서 교실 문을 열자 모든 형 누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조금 긴장되고 떨리던 심부름기억이기도 했다.
엄마는 산속의 절을 이따금 갈 때면 나를 데리고 갔다. 동네 텃밭에 가서 농사지을 때도 많이 데리고 가면서 이 나무는 뭐고 이 꽃은 뭐고 설명을 한참 해주었다. 난 아직도 꽃이나 나물이나 나무나 그런걸 잘 구분은 못하지만 그것들이 예쁘고 아름답다는 기억은 남는다.
여기에 조금더 보태면 내가 공부하고 있거나 뭐 다른 걸 몰입해서 한창 집중해서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나를 부를 때가 있다. “철훈아!!!!”“철훈아!!!”“빨리와서 이거 봐봐!!!”라고 아주 다급한 목소리 연기를 하시며 나를 불러서 ‘난 어릴 때는 큰 사고가 터졌나? 전쟁이 났나?’ 불안불안해 하며 가보면 티비에 야생화나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또 속았군’ 하지만 안 오면 올 때까지 부르기 때문에 다급히 불러서 티비 앞에 가보면 또 야생화 자연풍경 그런 것들이었다.
엄마가 어릴 때부터 뭘 자꾸 보라고 하는 바람에 난 커서 사진을 취미로 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이나 사진을 보라고 자꾸 권하는 습성이 생긴 게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것들이 다는 아니겠지만 원주에서 살 때 9살까지의 엄마와의 추억 들이다. 다는 안 떠오르지만 내 기억과 엄마의 기억은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쓰고 나니 마음이 한결 밝아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