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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뱀을 죽이다-장정일-

by 까르멘 2019. 8. 24.



처음 뱀을 죽이다


-장정일-



첫 번째 뱀




우리들 선입관 속에는 뱀을 싫어하는 무엇이 있다

그리고 두 발 가진 짐승과 발 없는 짐승 사이에는

서로 피해 가기로 한 묵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미덕인지 말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 편리한 약속이 오래 지켜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저지르고 만 것이다

옻 순을 뜯으면 돈이나 좀 될까 싶어

산을 타고 다니던 지난봄. 그 작은 호숫가, 생각나지?

달리의 풍경 속에 뛰어든 듯 황량한 호숫가

누런 황톳벌에서 어린 뱀 한 마리를 죽인 것이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옻 순이 가득 찬 자루를 팽개치고

어디서 그런 열정이 솟아났는지

가랑이와 등줄기로 흐르는 서늘한 흥분을 느끼며

이른 아침, 물 마시러 왔던 화사를

몇 번이나 그놈이 자기 배로 지나갔음 직한 돌로

짓. 찧. 었. 다.



지나간 어린 시절에

한 번씩은 장난 삼아 뱀을 잡아 죽일 때에도

무서워 진저리 치전 내가 그렇게 잔인하게

하나의 생명을 살해한 것을 보면

꼭 뱀을 죽여야만 성년이 된다는 강박 비슷한 것이

너, 나 할 것 없는 모든 남자의 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



후회인지 지금은 두려움 비슷한 것이 생기고

너를 만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바람에게 춤을 가르치는 비단 커튼같이

팔천 마디 척추를 꿈틀거리며 다가와

경건한 내 호기심과 흐드려졌다면

지금쯤은 너나 내가 행복할 것을. 그러나 안녕

피해 가기로 했던 묵계는 깨어졌네

피 묻은 강화비엔 전쟁을 위한 새로운 규칙이

음각되고 나는 뱀에게 물릴 것을 고대한다

다만 그들의 복수가 내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지기를. 배반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무덤이 뱀들의 겨울 침대로 사용되길 바라지는 않으니까




두 번째 뱀




호숫가, 이 호숫가 숙명의 진흙 벌 위에

이렇게 많은 뱀 껍질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다. 처음 뱀을 죽인 것이 나란 말인가

내가 뱀을 죽인 시조가 되는 것인가



아니다 처음 뱀에게 돌을 던진 자는

뱀을 만든 그 자가 아니었을까

지독한 건망증의 사나이 혹은 심술궂던 장난꾸러기

바로 그자가 아니었을까

뱀에게 발을 만들어 주지 않았던 바로 그자가

처음 뱀을 살해한 장본인일 것

이제 나는 나의 두려움을 거두어들인다



그래 뱀들은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신중히 생각하는 저울추같이

동그란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한 것이다

똥을 삼키는 개와 오물 속에 뒹구는 돼지에게조차

발이 있는데 우리에게 발이 없다니

이......수치......이......굴욕!



그리하여 부끄러운 육신은 동굴에 모여

낳은 새끼를 집어삼켰고

가까스로 살해를 피해 자라난 자식들이

다시 제 어미를 물어뜯는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누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가장 먼저 샘을 찾고 가장 포근한

겨울 침대를 고를 줄 알던 위대한 뱀이 있어

수치 속에 똑바로 일어나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우리가 오래 슬퍼하기보다는 차라리

복수하는 것이 나으리라



하여 뱀들의 복수는 신의 발뒤꿈치를

물어뜯었고, 물어뜯긴 발꿈치는

바로 우리들의 심장이었던 것.

먼저 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면

뱀들의 복수가 정당하고 그 다툼 사이에서

우리들은 희생양이 된 것




세 번째 뱀




그자가 누구의 아들이건

세상과 화해하고 싶은 자는 먼저

뱀들과 화해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 구세주는 흰 뱀이 되어 다시 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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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서 장정일의 칼럼에 장정일 본인이 쓴 시가 언급이 되어있길래 책을 구매해서 발췌해 올립니다.

이시집은 1988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