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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창작과 농담>을 읽고 인상깊은 구절을 발췌하며

by 까르멘 2021. 12. 25.

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 있어도 좋은 방>

< blog.daum.net/farany >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 책은 근래에 들어 제가 애정하게 된 작가 이슬아가 새로 발간한 책, 창작 동료 인터뷰 <창작과 농담>입니다. 뻔하디 뻔한 연예 매거진이나 언론사에서 하는 가수나 배우들에 대한 인터뷰가 아닌, 신선하고 참신한 내용의 인터뷰가 진행되어 읽는 내내 <우와~ 재밌게 인터뷰 잘한당~>하고 속으로 생각했답니다.

 

중간 중간 실려있는 컬러사진들도 눈이 호강하게 했답니다.

 

인터뷰 대상은 <황소윤>, <김규진>, <장기하>, <강말금>, <김초희>, <오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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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윤 X 이슬아

2020.03.08.

 

81페이지

 

오늘 처음 만난 우리, 귀엽고도 징그러운 두 사람의 인터뷰도 끝이 났다. 나는 녹음기를 껐고 옆에서 함께 듣던 황예지와 장예진은 촬영 장비를 정리했다. 내일의 일터가 우리를 기다렸다. 테이블 위에 남은 떡볶이를 다들 한 입씩 먹었다. 황소윤이 말했다. “처음보다 더 맜있어졌다. 떡에 양념이 뱄어.” 정말 그랬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처음보다 맛있는 떡볶이적인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어쨌든 신인의 시간은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점점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점점 더 풍부해질 수 있을까. 황소윤의 질문처럼 어떤 에너지를 품고 살아가야 그럴 수 있을까?

 

다 같이 집 밖에 나가서 콧바람을 쐬었다. 넷이서 함께 달을 보았다. 문득 황소윤이 친구에게 말하듯 말하고 싶었다.

 

‘걱정 마, 가자!’

‘어디로?’

‘내일로, 미래로.’

 

꼭 만화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었지만 말이다. 세계 여성의 날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김규진 X 이슬아

2020.09.02.

 

158페이지

 

“저희 집에서는 언니가 병뚜껑 열기 담당입니다. 항상 제가 먼저 열겠다고 덤벼들지만, 생각보다 사지에 힘이 없는 스타일인지라 결국에는 실패하고 넘기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언니는 대신 병을 열며 ”자기가 다 돌려놓은 건데 내가 마무리만 한 거야“라고 저를 복돋아주곤 합니다. 오늘 구청에 가며 왠지 저 생각이 났습니다. 굳게 닫혀 있는 병을 한 명씩 돌려도 보고, 뜨거운 물도 붓고, 그 모습을 보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시도하다 보면, 제가 열지 못하더라도 결국에 병은 열리게 되어 있지 않을까요? 분명 그럴 겁니다.”

 

-김규진,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215쪽

 

장기하 X 이슬아

2020.09.10.

 

191페이지

 

고등학교 때에는 신을 믿었다. 대학 초년생 때에는 이런저런 철학 사상을 믿었다. 그 후에는 음악을 믿었다. 그중에서도 밴드, 밴드 음악을 믿었다. 아마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늘 뭔가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무언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것에 연연하기도 하지만, 종교처럼 믿지는 않는다. 밴드는 내가 가장 최근까지 믿었던 무언가다. 어쩌면 내가 오늘 자유로 위에서 느낀 것은 내 인생에서 믿음의 시절이 지나갔다는 데서 오는 서글픔이었는지도 모른다.

 

-장기하, 『상관없는 거 아닌가?』, 105쪽

 

강말금 X 이슬아 X 김초희

2021.02.10.

 

269페이지

 

강말금 : 연극 현장에서 조연을 맡았을 땐 남들 뒷담화를 하기도 했어요. 물론 사이좋게 지낼 때도 있었지만 맨날 연습하고 붙어있다 보면 왜 마음이 꼬일 때도 있다 아입니까. “쟈 와 저러는데? 내가 와 저거를 보고 있어야 되는데? 내 같으면 저래 안한다.”하고 욕을 하기도 했어요. 긍까는 제가 모지랬던 거죠. 주인공을 맡은 사람 처지는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제가 모르는 부담도 있었을 테고요.

 

<찬실이>를 하며 주인공이 되고 현장이 내 꺼가 되니까 절대로 욕이 안나오더라고요. 모두 내 편인데 어떻게 욕을 합니까. 하나라도 편을 들어주고 내일 더 나아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뒷담화 같은 건 저절로 안 하게 돼요. 예전부터 주인공들은 그래왔더라고요. ‘주인공의 그릇이라는게 자리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구나’ 주인공을 해보고 나서야 알았지요.

 

오혁 X 이슬아

2021.05.25.

 

384페이지

 

오혁과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 적는다면 아주 여러 번의 말줄임표를 써야 할 것이다. 

그가 숙고하는 동안 흐르는 침묵 속에서 나는 그의 완벽한 두상과 손가락들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러한 공백 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면 노래 같은 건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하면서. 대답과 대답 사이의 공백을 너무 소중히 여기면서.

 

허무와 회의의 세계로부터 사랑과 응원의 세계로 이동해온 오혁의 노래들을 시간순으로 다시 듣는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가 되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그 노래들은 나를 조금 과묵하게 만든다. 과묵 속에서도 충분하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소망하고 있다. 멋과 미를 품은 이 사람에게 그저 체력이 주어지기를. 불안을 견딜 체력. 심사숙고할 체력. 새로워질 체력. 죽음을 잊지 않을 체력. 그 체력으로 그는 다음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가 생을 안타까워하는 만큼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노래는 아름다울 것이다.

 

에필로그

 

397페이지

 

최근의 술자리에서 황소윤이 내게 물었다. 창작자에게 특히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견디면서 계속하는 힘이라고 대답했다. 언제나 맘에 쏙 드는 것만을 내놓는 창작자도 어딘가엔 있겠지만 나는 그런 창작자가 아니다. 나랑 비슷한 창작자라면 지나친 엄격함에 짓눌리지 않도록 애쓰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을 듯하다.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곤 한다. 반복하면 더 잘하게 된다고 격려하며 자신을 너그럽게 다룬다. 이 책의 창작자들에게서도 그런 마음의 균형을 본다. 우리는 아마도 이 짓을 오래 할 것이다. 오래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다.

나 같은 걸 내놓으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그게 창작의 오려움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모두 농담같은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네 손으로 하는 실뜨기처럼, 괜히 손가락에 실을 걸고 허공에 띄우며 이리저리 놀아보는 것처럼, 창작은 재밌고 복잡하고 허탈한 무엇 같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봐줄 한사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것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