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대신 눈에 띄는 구절들을 발췌하는 것이
원작의 느낌을 잘 전달할 것만같고
본문전체를 읽어보고싶은 생각도 하게 되어
책도 직접 찾아보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해봅니다.
블로그 <숨어 있어도 좋은 방>
< blog.daum.net/farany >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이 "독후감 대신 인상깊은 구절 발췌정리하기" 작업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면
이 블로그에 멋진 서재가 하나 마련되어지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번 책은 근래에 들어 제가 애정하게 된 작가 이슬아가 새로 발간한 책, 이슬아의 이웃 어른 인터뷰 <새 마음으로>입니다. 작가 이슬아의 생활반경에 가까운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책입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청소 일하시는 여사님. 선배의, 농사짓는 어머니. 이슬아의 외조모, 외조부. 인쇄소의 기장님. 인쇄소의 경리. 자주 들르는 옷 수선집의 할머니.를 인터뷰했습니다.
각 인터뷰 소제목은 <응급실 청소 노동자 이순덕>, <농업인 윤인숙>, <아파트 청소 노동자 이존자, 장병찬>, <인쇄소 기장 김경연>, <인쇄소 경리 김혜옥>, <수선집 사장 이영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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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청소 노동자 이순덕
2020.03.18.
48페이지
순덕 님은 “사는 게 너무 고달팠어요”라고 말한 뒤 “그래서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어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 두 문장이 나란히 이어지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너무나 많이 치우고 너무나 많이 헤아리는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순덕이라는 개인이 해내는 촘촘한 일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순덕 님과 함께 목마공원을 한 바퀴 산책했다. 걷다가 순덕 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팔짱을 꼈다. 27년을 일하면서 이렇게 목마공원에 와보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다. 병원 정문 코앞에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고, 항시 동동거리며 지낸 것 같다고 하셨다.
“일 얘기를 이렇게 쭉 한 거는 처음이에요. 얘기를 하니까 행복하네.”
순덕 님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삶이라는 게 몹시 길게 느껴졌다. 순덕 님과 같은 일흔 살이 되기에 나는 아직 먼 것 같아서다. 울면서도 완벽하게 청소할 수 있을 때까지, 내 노동으로 일군 자리에 다른 이를 초대할 수 있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 어른이 되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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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인 윤인숙
2020.06.10.
100페이지
문득 ‘그린 핑거스’라는 말이 떠올랐다. ‘식물 재배의 재능’이란 뜻이다. 어수선한 시절에 만난 인숙 씨에게서 단순하고 명징한 진리들을 잔뜩 배운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땅을 기억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음식을 사먹거나 배달시켜 먹는 동안에는 땅이 무엇인지 잊기 일쑤였다. 땅이 우리에게 얼마나 끊임없는 생명력을 베푸는지, 인숙 씨의 논과 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땅을 잊지 말자고. 농부님들의 일을 더 자주 기억하자고.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한 시대에는 더더욱.
105페이지
인숙 씨는 자꾸자꾸 새 마음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새 마음, 새 마음, 하고 속으로 되뇌인다. 약한 게 뭘까. 강한 게 뭘까. 인숙 씨를 보며 나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한다. 인숙 씨의 몸과 마음은 내가 언제나 찾아 나서는 사랑과 용기로 가득하다. 그에게서 흘러넘쳐 땅으로 씨앗으로 뿌리로 줄기로 이파리로 열매로 신지 언니에게로 나에게로 전해진다.
인숙 씨는 용기투성이다. 나는 인숙 씨처럼 강해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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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청소 노동자 이존자, 장병찬
2020.06.19.
154페이지
나랑 결혼하면 조밥을 먹게 될 거라고 예고했던 남자와 죽사발에도 웃음이 있으면 살겠다고 대답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날에 여자는 남자의 등에 붙어있던 송충이를 떼어주었다. 먼 훗날에 여자는 죽음의 능선에 서 있는 남자 등을 떠밀어서 남자를 살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을 지어내며 남자가 여자의 등을 한참 쓰다듬어준 것은 사실이다.
155페이지
배운 게 별로 없었지만 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존자 씨와 병찬 씨. 그들의 생애는 서로를 살리며 흘러왔다. 한 고생이 끝나면 다음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 어떻게 자라야겠다고 다짐할 새도 없이 자라버리는 시간이었다.
고단한 생로병사 속에서 태어나고 만난 당신들. 내 엄마를 낳은 당신들. 해가 지면 저녁상을 차리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당신들. 해가 지면 저녁상을 차리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당신들. 계속해서 서로를 살리는 당신들. 말로 다할 수 없는 생명력이 그들에게서 엄마를 거쳐 나에게로 흘러왔다. 그들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의 엄마로부터 흘러내려온 생명력일 것이다. 어쨌거나 생을 낙관하며, 그리고 생을 감사해하며.
알 수 없는 이 흐름을 나는 그저 사랑의 무한 반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이 나의 수호신들 중 하나였음을 이제는 알겠다. 기쁨 곁에 따르는 공포와, 절망 옆에 깃드는 희망 사이에서 계속되는 사랑을 존자 씨와 병찬 씨를 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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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 기장 김경연
2020.09.17.
197페이지
겪어본 인터뷰 현장 중 가장 시끄러운 장소였다. 기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낸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쿵쾅쿵쾅 계속되었다. 그 소리는 이야기가 찍히고 있음을, 책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내 심장도 덩달아 쿵쾅쿵쾅 뛰었다.
인쇄기는 버스 두 대를 이어놓은 것만큼 길고 거대하다. 여러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합의 본 이야기들이 그 안에서 복제된다. 매우 중대한 기계인 것이다. 감리 직전까지 데이터를 살피고 또 살피던 작가와 편집자와 디자이너들은 인쇄기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잘 부탁드린다고, 무탈히 책이 나오도록 도와달라고.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늘 뭉클해지지만, 아마도 그건 기계를 잘 모르는 이들의 기도일 것이다. 어떤 일이 자기 손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을 때 올리는 게 기도이기도 하니까. 기계를 아는 기장님들은 차분하게 묵묵히 조작할 뿐이다. 그때부터는 모든 게 기장님들의 손에 달렸다.
당신이 어디에선가 이 책을 손에 쥐고 읽고 있다면 그건 인쇄소와 출판사의 약속이 지켜진 결과다. 기장님과 인쇄기가 함께 일한 결과다. 당연해 보이는 이 사실이 몇 번이고 신비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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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 경리 김혜옥
2020.09.18.
222페이지
인터뷰를 마치자 혜옥 님이 “휴”하고 숨을 몰아쉬셨다. 맨날 해오던 일인데도 직접 말하려니 어색하신 듯했다. 너무 새삼스러워서.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서. 대단한 건 작가 분들인 것 같다고 혜옥 님은 말씀하셨다.
하지만 인쇄소의 직원분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작가의 몫이 얼마나 일부인지를 알게 된다. 쓰고 그리는 사람만으로는 책이 완성될 수 없다. 책뿐만아니라 모든 크고 작은 물건들이 그렇다. 숫자로 이루어진 약속을 살피고 책임지는 사람들이 사이사이에 있다. 혜옥 님의 오차 없는 세계. 깐깐하고 꼼꼼한 그 세계를 거쳐 기장님들의 노동이 다음으로 착착 넘어가고, 작가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완성된다.
이틀간 두 곳의 인쇄소에 찾아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더 많은 분들이 그곳에 계실 것이다. 앞으로도 따뜻한 존중 속에서 그분들과 협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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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집 사장 이영애
2021.05.13.
272페이지
이영애 사장님이 주인공인 영화의 끝을 상상하고 있다. 스크린이 어두워지고 그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인생이 바라던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던 이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오를 것이다.
대전의 가난한 팔남매들, ‘주’자 돌림 형제들과 ‘영’자 돌림의 자매들의 이름, 공자에서 만난 오야와 시다들의 이름, 영애와 함께 상경한 고향 여자애들의 이름, 하꼬방에서 함께 자취한 친구의 이름, 재단사들의 이름, 샘플사 직원들의 이름, 남편의 이름, 남편과 사랑을 했던 여자의 이름, 시어머니의 이름, 자식들의 이름, 며느리들의 이름, 손자들의 이름......그리고 찬무 할아버지의 이름도 거기에 있다. 엑스트라의 차례가 되면 셀수도 없이 많은 인물의 이름이 올라온다. 수선집을 드나든 손님들의 이름이다.
그 모든 주조연들 중 아무도 밉지 않다고 주인공인 영애 씨가 말한다. 어깨에 힘을 빼고 수선집 앞을 산책하며 말한다.
수선된 원피스로 갈아입은 나를 영애 씨가 본다. “봄이니까 이렇게 살랑거리고 다니면 되겠네.”하며 내 등을 매만진다. 나는 그런 영애 씨의 조연이라 기쁘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에 산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진다.
영애 씨가 고쳐준 옷을 입고 살랑거리며 미래로 간다.